엄마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동네에서 꽤 규모가 큰 금은방이었다. 환한 조명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금붙이 때문에 사방이 다 반짝거렸다.
'니는, 이런 거 사줄 오빠야도 없노. 니 나이 때는 이런거 한창 하고 다닐 땐데.'
엄마는 그 날. 내 생일선물로 실금처럼 얇은 금팔찌를 선물해줬다. 그 집 딸도, 저 집 딸도 있다는 커플링은 커녕 금으로 된 액세서리 하나 없이 회사-집만 오가던 딸이 속상해서가 이유일거라고 추측한다.
서른(예전 한국나이)이 넘을 때까지 남자친구가 없을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 때 처음 좋아했던 남학생. 대학생 때 꼬박 2년 가까이 좋아한 동기. 교회 다니던 시절에 반년 정도 좋아한 교회오빠 등.
짝사랑 경력은 화려하다. 문제는 빛나고 아름다운 10대와 20대에 한 거라곤 짝사랑이 전부라는 것.
눈을 마주치는 순간 눈 앞이 하얗게 변하던 순간. 힐끔힐끔 보게 되던 시선. 시덥지 않은 몇 마디 대화에도 자꾸 올라가던 입꼬리. 뭐하나 종일 궁금해 하는 마음.
나는 몇 번이고 사랑의 바다에서 넘실댔다. 상대방이 드넓은 바다에 내 존재를 몰랐을 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게 관심없고, 내가 관심없는 사람은 나를 쿡쿡 찌르는 환장할 사랑의 작대기는 매번 어긋났다.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고 성격이 활발하지도 않은 이 어른은 노력없이 운명처럼 남자가 앞에 딱! 나타나길 바랐다. 책이나 읽고 공부나 하면서 학교-집, 회사-집을 했으니 연애가 될 리 없다.
이제 연애를 위한 노력을 할 차례인데 꿈 많은 나는 연애가 아닌 재테크의 길로 들어가 노력과 근로를 몰빵했다.
그 결과물로 얻은 돈으로 대학원을 갔는데 여전히 가진 게 없어서 직장생활을 병행했다. 독립적인 성격이라 혼자서 잘 놀았다. 가끔 친구와 노는 걸로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선택의 순간마다 남자 대신 꿈을 택했지만 가끔 평생친구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게 꿈으로만 남을까봐 씁쓸하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바쁘게 살던 어느 날, 당시 내가 하던 일과 관련된 자격 연수를 신청했다. 운 좋게 덜컥 선발돼서 연수에 참여했다. 낮에는 직장, 밤에는 대학원, 주말에는 연수.
반좀비상태로 살던 내게 연수 짝꿍 선생님의 제안이 스윽-들어왔다.
짝꿍 선생님은 자신의 근무지에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 있다며 소개팅 의사를 물었다. 나를 좋게 봐주시는 마음이 감사해서 예스!를 외쳤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한가하고 여유로울 때 없던 남친이 바빠죽겠는 지금 생기겠나 싶었다.
소개팅 당일. 예전 소개팅과 달리 남자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저녁식사로 나온 스테이크를 잘 먹은 정도가 아니라 접시까지 핥아먹은 것 마냥 깨끗하게 싹-다 먹었다.
애프터를 받았지만 다들 데이트 때 뭐하는지 모르니까 2번째 만남에선 내가 즐거운 방탈출하러 갔다. 친구가 '아니, 무슨 방탈출을 하러 가냐!'고 했지만 난 신났다.
나! 찐빵이! 좋아해!
이마에 써놓고 다니는 것 마냥 행동하는 그가 부담스럽긴 커녕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그에게 기우는 마음을 알아서 나는 온갖 질문과 테스트로 그가 안전한 사람임을 확인하려고 했다. 가족과의 유대관계, 친구관계 탐색, 애착테스트 등. 장거리 연애는 커녕 연애를 해본 적 없어서 데이트는 1달에 2번?3번?을 얘기했다가 그를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정도면 아, 얘는 못만나겠다. 싶을텐데 타지역에 사는 그는 휴무일마다 내가 사는 지역으로 왔다. 웃음의 역치가 낮아서 자주 헤실헤실 웃고 예민해서 걱정도 눈물도 많은 나는 예상과 달리 그와 싸울 일이 없었다.
(만)서른의 연애는 이런걸까. 그는 서운하고 화나는 건 그 자리에서 얘기하고 풀자고 했다. 내 방식은 대체로 참다참다 안 되면 얘기하고, 애초에 개선가능성이 안 보이면 멀어지는 편이었다. 서운함.화남.짜증. 이런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서투른 나는 그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를 말하는 습관을 들였다. 부정적 감정이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끄기 때문에 감정상태는 늘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아이스크림을 골랐는데 똑같은 문구를 뽑아서 (나만)깔깔 웃으며 사진찍었다 :)
아, 연애 참 좋은거였네.
만서른의 첫 연애. 나는 돌다리를 일천번쯤 두드렸고, 보통 이쯤하면 가던데 그는 계속 손을 내밀고 기다려줬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함께하기로 했고, 나의 첫 남자친구는 내년에 남편이 될 예정이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 진작 좀 이어지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 건 기적이라던데 나 빼고 다 기적을 경험한다고 여겼던 시기. 다 인연이 있다던데 내 연인은 태어나긴 했냐고! 툴툴 거리던 마음.
곰곰히 생각해봤다. 몰랐구나,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똑같이 툴툴대며 가만히 운명만 기다렸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운명인 줄 모르고.
연수 첫 날.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면 남아있던 제일 앞 줄 빈자리에서 짝꿍쌤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 연수를 신청할까, 말까 하다가 안했더라면 만남의 기회조차 없었다. 그 전에 경력을 쌓게 해준 당시 회사의 스카웃제의를 거절했다면 연수 선발이 안 됐겠지.
이런 걸 보면, 모든 순간이 다 인연을 만들어가던 과정이었다. 모든 건 타이밍이구나. 나의 모든 선택은 알알이 모여 그와 단단히 얽혔다. 아주 바빴고, 20대보다 내면이 더 단단해져 가던 내게 그가 나타난 건 알맞은 시기였다. 덕분에 나는 바쁜 시기를 잘 버텨내고 조금 더 자랐다.
서른에 그를 만났기에 나는 함께 맞춰가되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조금 더 관용적인 마음으로 서로를 귀엽게 여길 수 있게 됐다.
모든 순간과 선택은 또 알알이 모여 어느 알맞은 시기에 우리는 평생을 함께하길 약속하고, 아이라는 존재에 감동하며, 서서히 함께 늙어갈 것을 안다. 때로는 힘들겠지만 그만큼 따뜻한 과정일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