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와 양호열, 키리시마와 히로키

by 샤사샥

오랜만에 슬램덩크를 다시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의 저는 관찰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보이는 지점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예를 들어, 정대만의 과거를 회상하는 안경 선배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철이가 괜히 정대만에게 "너는 스포츠맨이 더 잘 어울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그마한 서사들 덕분에 슬램덩크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 감성이 풍부해지더군요. 그리고 백호군단으로 뭉뚱그려지던 조연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백호군단의 핵심 인물은 당연히 양호열입니다. 양호열 참 잘생겼고 의리도 엄청나고 심지어 싸움도 기가막힙니다. 조연으로만 두기에 아까운 인물이에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한 장면이 제 눈에 박혔습니다.

송태섭의 첫 등장 바로 직전 장면입니다.


김대남: 아아 심심해
양호열: 대남아, 너도 뭔가 할만한 일을 찾아보지 그래?
김대남: 그럼 호열이 넌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거냐?
양호열: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저는 이 대화를 듣고 일본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가 생각났습니다.



영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한 고등학교의 최고 인싸이자 배구부 에이스였던 키리시마가 갑자기 동아리를 그만둔다는 소식이 그의 친구들에게 전달되면서 발생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키리시마는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러자 키리시마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패닉에 빠지고 키리시마를 찾아 헤맵니다. 괜히 "그 날 이후, 우리의 세상은 무너졌다"고 포스터에 적힌 것이 아니죠. 포스터의 인물 히로키는 키리시마의 절친이고 키리시마가 부재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키리시마라는 타인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비중이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게 영화의 대략적인 얼개입니다.



이쯤되면 위 대화를 듣고 제가 왜 이 영화를 떠올렸는지 아실 겁니다. 양호열의 이야기가 갑자기 궁금해졌거든요. 백호가 바스켓맨이 되면서, 그동안 있던 백호군단과 백호와의 관계에 분명히 변화가 이뤄졌을 것 같거든요. 물론 영화처럼 극단적이거나 극적이지는 않을 겁니다. 충분히 양립 가능하죠. 하지만 백호군단의 삶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즉, 백호라는 인물이 양호열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나면서(양호열이 스스로 미뤄냈다기보다는 백호가 농구에 전념하면서 그 간격이 벌어지는 거죠), 그 심심함이라고 표현되는 그 빈 공간을 오롯이 들여다보며 자신의 삶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든 발견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백호가 없는 양호열의 삶이 궁금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산왕전 이후, 이제는 어엿한 바스켓맨이 된 강백호와 백호군단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양호열은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갈지 궁금해졌습니다. 호열이의 꿈은 무엇일까요. 양호열은 백호 없는 세계에서 자신에 대해 무엇을 발견할까요. 마찬가지로 김대남, 이용팔, 노구식은 그 심심함/빈공간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겠지만 이제는 조연들, 그들의 삶도 궁금해졌습니다.


참고로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라는 작품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물론 남자 주인공 배우(히로키역)가 히가시데 마사히로라고... 아스달 연대기에 나왔던 카라타 에리카와 불륜을 저질렀던 그 인물입니다. 만약 이 부분에 민감하시다면... 스킵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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