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왜 마녀까지도 착해야 하는 것인가!
최근 수십 년간, 전반적인 인권 운동, 여성 운동의 성장과 함께,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차별과 편견에 가득 찬 동화를 올바르게 다시 고쳐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동화 속 수동적 여성의 이미지를 모험심 강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못된 계모와 사악한 마녀를 자애롭고 현명하고 여성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이제 이러한 흐름에 맞춰 디즈니 영화조차 전형적인 동화 캐릭터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여주인공들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있으며, 인류학자, 여성학자를 고용하여 '올바르지 못한'(?) 줄거리와 표현을 고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학자 바바라 G. 워커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기존의 동화를 다시 쓴 동화 모음집 <페미니스트 동화 Feminist Fairy Tales>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흑설 공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녀는 기존 동화에서 남성은 힘, 재력, 권력의 주체가 되는 늠름하고 씩씩한 존재로 묘사되어온 반면, 여성은 한결같이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였으며, 특히 여주인공은 아름답고 심성이 고와 왕자의 구원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 표현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동화책에서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개척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성취하는 여성들을 제시하고 있다.
<말레피센트 Maleficent, 2014> 역시 이러한 흐름에 따른 영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디즈니가 동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영화로 만든 것으로, 공주가 아닌 마녀 말레피센트를 주인공으로 하여 기존 동화를 리라이팅 rewriting한 작품이다. 기존의 디즈니 동화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페미니스트의 관점에 동참한 새로운 디즈니 창작을 시도한 듯하다.
신비한 생물들의 왕국 무어스를 다스리는 마녀 말레피센트는 인간의 왕국을 지배하는 스테판 왕과 원한이 있다. 두 인물은 과거에 연인이었지만, 스테판 왕이 자신의 세속적 야심을 위해 그녀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의 딸 오로라의 탄생일, 마녀는 원래의 동화에서처럼 아기에게 16세가 되는 날, 성 안에 있는 물레에 찔려 영원의 잠에 빠질 것이라는 저주를 건다. 마녀가 원래부터 사악했던 것은 아니며, 왜 저주를 했는지 그녀의 입장에서 설명해주며 그녀를 옹호하는 것이다.
왕은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공주를 성에서 떠나보내 숲의 세 요정에게 기르게 한다. 한편, 말레피센트는 늘 오로라 공주를 멀리서 지켜보며, 차츰 애정을 느끼게 되고, 위험할 때마다 구해주는 수호천사 역할을 한다.
오로라 공주가 16세가 되자 말레피센트는 자신의 저주를 후회하지만, 이미 공주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성으로 찾아가고, 마침내 물레에 찔려 잠에 빠진다.
그리고 말레피센트는 공주의 이마에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키스를 한다. 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이 아닌 마녀의 키스로 마법에서 풀리게 된다. 공주는 말레피센트의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주어 그녀를 돕고, 결국 스테판 왕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죽은 아버지를 이어 공주는 여왕이 되고, 왕자와 결혼도 하지만, 여기서 왕자의 역할은 미미하다.
기존의 악의 존재, 공주를 저주하여 죽음의 잠에 빠트리는 사악한 마녀는 선량하고 따뜻한 여성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마녀의 위상을 회복시키려 했다. 광신적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산파와 약제사, 의녀로 활동한 총명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을 완전 차단하여 남성 중심의 사회 체제를 공고히 했다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보는 '마녀론'이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여성주의적 시각에 근거하여, 마녀 말레피센트를 착하고 현명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마녀 말레피센트의 배역에 안젤리나 졸리는 더할 나위 없는 환상적인 캐스팅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착한 마녀 캐릭터는 김 빠진 공처럼 맥이 빠지게 한다. 그야말로 충실한 악의 화신으로 남았다면, 이 영화의 서사는 좀 더 극적인 활력을 창출했을 것이다.
민담과 설화에서 유래한 동화는 원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순화된 동화와 매우 다르다. 민간에 전해 내려 오는 구비문학으로서의 민담은 우리를 놀라게 할 만큼 너무나 잔혹하고 거칠다. 현대의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는 17세기 프랑스의 문학가인 샤를 페로 Charles Perrault와 19세기 그림 형제 The Brothers Grimm의 책들로부터 유래되었다. 페로는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온 민담을 모아 최초로 글자로 된 책 <옛날이야기 Histoires ou contes du temps passé>를 출간함으로써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확립했고, 그림 형제가 그림 동화로 알려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Children's and Household Tales>를 펴내면서 다시 한번 민담을 정리했다.
이들의 동화집은 나름 부르주아지적 가치관으로 본래의 어둡고 잔인한 이야기를 순화하여 다시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여전히 어린이에게는 맞지 않은 내용이 많이 있다. 사실 이전의 어린이는 '작은 어른'으로서, 대체로 그 발달 단계에 따른 배려나 보호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의 어린이 존중 사상은 현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화 역시 걸러지지 않은 거친 형태로 어린이들에게 읽혔다. 이러한 날것의 동화는 20세기에 와서 디즈니에 의해,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변경하여 순화하고 단순화시킨 각색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디즈니 동화는 성 차별, 인종주의, 얄팍하고 지루한 아메리칸드림의 성취, 왜곡된 현실 인식과 지나친 낭만성,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판타지 종합 선물 세트였다.
이에 반발해,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대안 동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바라 워커의 <페미니스트 동화>이다. 여기엔 '백설 공주 Snow White'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다시 쓴 '스노우 나이트 Snow Night'가 수록되어 있다. 백설 공주의 못된 계모 왕비는 여기서 현명하고 선량한 마녀로 변신해 악인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고 이웃 나라 왕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추녀와 야수'에서는 못생겼지만 착한 막내딸이 야수와 진실한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뚱뚱하고 곰보인데다 곱사등이인 추녀이며, 야수도 마법의 변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추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외모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동화들은 이른바 '올바른 동화'라고 일컬어지며, 페미니스트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스노우 나이트'에서는 공주와 왕비의 기본적 갈등구조를 없애고 계모가 공주를 돕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외모에 집착하여 질투하고 상대를 해치려는 기존의 부정적인 여성상을 깨고 착하고 긍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듯하다. '추녀와 야수'의 경우에도 외모지상주의를 깨부수고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대안 동화에서는 어떤 드라마틱한 반전과 재미가 빠지고, 상투적이고 뻔한 모럴리즘만 남았다. 이야기의 필수 요건인 갈등 구조를 제거한 문학에 대한 무지함과 그 결과로 야기된 스토리의 무미건조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여러 지역에서 구전되고 다양한 버전으로 이어져오는 동안 축적된 인간의 깊은 내면과 본질에 대한 복잡한 해석을 무시한 독선이 아닌가.
신화나 민담은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축적해온 삶에 대한 통찰과 온갖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단순히 황당한 환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그냥 재미있는 옛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인류의 문화, 역사, 그리고 보편적인 삶의 경험에서 나온 문화적 원형 archetype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옛이야기에는 삶의 보편적인 문제들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 어둠, 가혹함, 부정적인 면, 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이 세상에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그들이 동심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 사회의 밝고 즐거운 측면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동화처럼 나쁜 계모란 가부장제 사회의 부정적 여성관을 반영할 뿐이며, 윤리적 관점에서 외모 중시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경우에 따라, 계모는 나쁠 수도 있고, 좋은 외모에 대한 선호는 진화론적 선택의 측면에서 본능적인 것이기도 하다.) 물론, 디즈니 동화의 얄팍한 가치체계와 원래 전래 동화의 서사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옛이야기는 삶의 부정적 측면과 가혹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대면하게 한다. 나아가 이런 인생의 역경에 대항하여 극복하고 끝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게 한다.
<말레피센트>의 원작 동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페로 본과 그림 형제의 판본, 그리고 이들의 것보다 훨씬 잔혹하고 노골적인 잠바티스타 바실레 Giambattista Basile의 <판타메론Pentamerone> 본이 있다. <판타메론>의 '해, 달, 탈리아'에서는 유부남 왕이 잠자는 탈리아를 강간하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간 사이, 탈리아가 두 명의 아기를 낳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광포한 질투에 빠져 두 어린이를 잡아와 요리해 왕에게 먹이려고 한다. 그러나 요리사는 새끼 염소를 대신 요리해 아이들을 살렸고, 나중에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왕비를 불 속에 던져 죽이고 탈리아와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
잠든 사이의 성폭력과 불륜, 남편의 내연녀에 대한 본부인의 사악한 범죄를 불러일으키는 질투, 이런 것들을 문학적 서사가 아닌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동화의 착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플롯, 그리고 선하고 올바르게만 끝나는 공허한 해피 엔딩 역시 억지스럽다. 어차피 인간의 삶에서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라면, 왜 마녀까지도 착해야만 하는가!
페미니즘 동화, 대안 동화, 이런 것들은 우리가 그동안 익숙해있던 가치 체계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 새로운 방향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 영화는 한 방향만 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이야기'는 그것이 가진 고유의 즐거움과 문학적 특성을 존중해줘야 한다. 소위 '올바른 동화'라는 일방향 가치에 의한 동화 죽이기'는 독선과 무지의 소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