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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닿지 않는 영원한 평행선, 혹은?

ㅡ 남과 여,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

by 김선지


남과 여, 그리고 타인과 타인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 몸만 옆에 있을 뿐이다. 더 지독한 것은 여자가 다른 남자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그리고 소설과 영화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스토리 설정이다.


많은 사람이 외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의 마음이 처음 본 순간 완벽하게 통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커플이 드물지 않을까. 그러기에, 아름답고 매혹적인 동시에, 너무도 아프고 힘겨운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딴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이 연인이건 부부이건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일 뿐이다.


<페인티드 베일 The Painted Veil, 2007년 작>은 영국 작가 서머셋 모옴 Somerset Maugham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남과 여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타인과 타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20년대, 영국 런던 한 사교 파티에서 말이 없고 조용한 세균학자이자 의사인 월터는 활달하고 아름다운 처녀 키티에게 한눈에 반해 청혼한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키티는 결혼을 탈출구로 생각하고 덜컥 청혼에 응한다. 결혼과 함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중국의 상하이로 간 두 사람의 신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하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표현을 잘 못하고 내성적인 월터와 활기차고 외향적인 키티는 감정의 평행선을 그린 채 살아간다.





그러던 중 키티는 사교 모임에서 지루한 세균학자인 남편과는 전혀 다른, 남자다운 매력과 유머가 넘치는 영국 외교관이자 유부남인 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찾던 완벽한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한편,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된 월터는 겉으로는 격렬히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내색하지 않은 채, 콜레라가 창궐하는 오지의 마을로 자원해 아내를 끌고 간다. 나도 죽고 너도 죽이겠다는 뜻일까? 그는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 사람이다.





영화에서는 사랑의 교차점이 이루어졌다


월터는 자신의 고뇌와 절망을 떨치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으로 환자들을 돌본다. 키티 역시 수녀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월터의 진면목에 눈을 뜨게 되고 마음을 연다. 원래 월터는 키티를 사랑했고, 다른 이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화가 나있었을 뿐이다. 키티가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면서 평행선을 그리던 두 사람은 마음의 교차점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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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피 엔딩은 아니다. 월터가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기 때문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야 서로를 알아본 남녀. 두 사람의 마음의 소통은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어쨌든,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을 고귀하고 아름답게 끝맺음한다.






사람마다 이 영화에 대한 생각과 해석이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남편의 복수극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다른 이는 헛되고 가벼운 열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해석할지도 모른다. 혹은, 사랑과 봉사의 고귀한 삶, 용서와 화해, 그리고 한때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진실한 사랑을 배워가는 인간적 성장 등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들이 총망라된 감동적인 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원작은 영화에 대한 우리의 이런 흐뭇한 느낌을 산통 깬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결국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서머셋 모옴의 소설은 전혀 반대다. 키티는 끝내 월터를 사랑하지 않고, 월터는 스스로를 콜레라 균에 감염시켜 죽음을 선택하는 우울한 엔딩이다.



원작 소설, 그냥 의문 부호로 남겨진 삶


영화에서, 키티가 찰스의 속물 근성에 환멸을 느끼고 월터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명쾌하고 감동적인 엔딩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면, 서머셋 모옴의 소설은 인간의 나약함, 삶의 아이러니,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함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그냥 인간과 삶의 문제를 의문 부호로 남겨 둔다.


영화처럼 소설에서도, 남편의 훌륭한 됨됨이를 깨달은 키티가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며, 그가 죽는 순간 울면서 자신의 과거를 참회한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열정의 덧없음을 느끼고,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도 얻게 된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후, 런던으로 간 키티는 찰스를 만나 다시 그와의 육체적 환락에 빠진다. 찰스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자책하며, 그녀는 왜 찰스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는지 스스로 묻는다.


월터도 소설에서는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게 죽지 못한다. 임신한 키티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를 콜레라 균에 감염시켜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죽은 것은 개였어."이다. 미친개가 사람을 물었지만, 사람은 치유되고 그 개는 죽는다는 뜻이다. 즉 월터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키티를 콜레라가 번진 사지로 밀어 넣어 죽이려 했지만, 그 화는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소설 속의 그는 영화의 고고하고 자기 희생적인 월터와 달리, 인간적 약점과 어리석음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영화도, 소설도 모두 수작이다. 인생에서 정답은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감정의 평행선을 달리던 두 남녀가 서서히 서로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고 사랑을 키워갈 수도 있고, 소설에서처럼 서로 다른 개성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끝내 교차점을 찾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닐까. 그리고 이 영화처럼 삶이 때로는 흐뭇하게, 혹은 이 소설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른 채 흘러가기도 하는 게 아닐까.


페인티드 베일 속의 인생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제목은 셸리 Shelley의 시 <베일을 걷어올리지 말라>에서 빌려온 것이다. 색 베일로 가려져 실체를 알 수 없는 우리 삶, 우리가 믿고 있는 그것들, 그러나 사실은 실체가 없는 허상으로 가득 찬 삶의 면면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우리는 색 베일로 가려진 인생에서 허깨비를 쫓으며, 지지고 볶고 부대끼면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뜻이겠지...



베일을 걷어올리지 말라


살아 있는 자들이 인생이라 부르는 색 베일을 걷어올리지 말라.

거기에 온갖 믿을 수 없는 것들이 그려져 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가 믿으려고 하는 모든 것을 색색의 베일로 위장한 허상일 뿐,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음울한 깊은 심연의 그림자를 창조한 운명의 두 여신, 두려움과 희망이 숨어 있다.

나는 언젠가 베일을 들어 올리려고 했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다정한 그의 심장, 그리고 사랑할 것들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슬퍼라!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상은 그가 인정할 수 있는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림자 가운데서 광휘를, 음울함 속에서 빛을, 진리를 향해 몸부림치는 영혼을 찾기 위해

그토록 애썼건만, 그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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