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지 Jul 06. 2023

왜 마녀까지도 착해야 하는가

ㅡ 섣부른 ‘동화 비틀기’의 위험성

<인문학 in movie> 제5화


https://theseoulite.org/?p=2339


최근 수십 년간, 전반적인 인권 운동, 여성 운동의 성장과 함께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차별과 편견에 가득 찬 동화를 올바르게 고쳐 쓰자는 ‘리라이팅(rewriting)’, 즉 ‘다시 쓰기’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동화 속 수동적 여성의 이미지를 모험심 강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못된 계모나 사악한 마녀를 자애롭고 현명하고 여성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춰 요즘은 디즈니 영화조차 전형적인 동화 캐릭터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여주인공들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있으며, 인류학자, 여성학자를 고용하여 ‘올바르지 못한’(?) 줄거리와 표현을 수정하고 있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다시 쓴 ‘말레피센트’


디즈니사의 《말레피센트》는 이러한 새로운 트렌드에 충실히 따른 영화다. 동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각색한 것으로, 공주가 아닌 마녀 말레피센트를 주인공으로 한다. 기존의 디즈니 동화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페미니스트의 관점에 동참하여 참신한 디즈니 콘텐츠를 시도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녀 말레피센트가 처음부터 사악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과 저주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그녀를 변호한다. 신비한 생물들의 왕국 무어스를 다스리는 말레피센트는 인간의 왕국을 지배하는 스테판 왕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과거에 말레피센트의 연인이었던 스테판 왕이 자신의 세속적 야심을 위해 그녀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레피센트는 왕의 딸 오로라의 탄생일에 나타나, 아기가 16세가 되는 날 물레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라고 저주를 내리게 된 것이다.

왕은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공주를 성에서 내보내서 숲의 세 요정에게 기르게 한다. 한편, 말레피센트는 늘 오로라 공주를 멀리서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애정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위험할 때마다 구해주는 수호천사 역할도 한다. 오로라 공주가 16세가 되자 말레피센트는 자신의 저주를 후회하지만, 이미 공주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성으로 찾아가고 마침내 물레에 찔려 잠에 빠진다.

그리고 말레피센트는 공주의 이마에 진실한 사랑을 담은 키스를 한다. 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이 아닌 마녀의 키스로 마법에서 풀리게 된다. 공주는 말레피센트의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주어 그녀를 돕고, 결국 마녀는 스테판 왕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죽은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은 공주는 여왕이 된다.


존 콜리어, ‘잠자는 숲 속의 미녀’, 1921년, 111.7 x 142.2 cm, 개인소장



동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주는 왕자와 결혼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왕자의 역할이 매우 미미하다. 또, 공주를 저주하여 죽음의 잠에 빠트리는 사악한 마녀는 선량하고 따뜻한 여성으로 탈바꿈한다. 사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산파와 약제사, 의녀로 활동한 총명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회가 능력 있는 여성의 공적 활동을 완전히 차단하여 남성 중심의 체제를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마녀론’이다. 그들은 마녀로 몰려 박해당한 지성인 여성들의 위상을 회복시키려 했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여성주의적 시각에 근거하여, 마녀 말레피센트를 선하고 현명한 인물로 묘사한다.

날카로운 광대뼈, 개성적인 헤어라인 등 특수 분장을 하고, 검정 코트를 입고, 거대한 뿔과 날개를 장착한 앤젤리나 졸리는 마법과 판타지의 세계에 어울리는,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인 마녀의 비주얼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말레피센트가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저 착한 마녀로의 전환에 집착한 나머지 생생한 캐릭터의 매력이 상실된 것이다. 그 결과는 바람 샌 공처럼 맥 빠지고 슴슴한 인물의 등장, 캐릭터의 붕괴였다. 말레피센트가 원작 그대로 악의 화신으로 남았다면, 영화의 서사는 좀 더 극적인 활력을 창출했을 것이다.



섣부른 ‘동화 비틀기’의 위험성


민담과 설화에서 유래한 동화는 원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순화된 동화와 매우 다르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구비문학으로서의 민담은 너무나 잔혹하고 거칠어서 종종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현대의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는 17세기 프랑스 문학가인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와 19세기 독일의 민속학 연구자인 그림 형제(Brothers Grimm)의 책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페로는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온 민담을 모아, 최초로 글자로 된 책 『옛날이야기(Histoires ou contes du temps passé)』를 출간함으로써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확립했다. 이후, 그림 형제도 민담을 정리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Kinder-und Hausmärchen)』라는 동화집을 펴냈다.

이들은 본래의 어둡고 잔인한 이야기를 나름대로 순화하여 서술하려고 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여전히 어린이에게는 맞지 않은 내용이 많다. 그 이야기들은 원래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구사회에서 근대 이전의 어린이는 그 발달 단계에 따라 배려와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동화 역시 걸러지지 않은 거친 상태로 어린이들에게 읽혔다. 20세기에 와서, 디즈니사는 기존의 동화에서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부드럽게 각색했다. 그러나 디즈니 동화는 성차별, 인종주의, 왜곡된 현실 인식과 달콤하기만 한 감상주의의 종합 선물 세트에 불과했다.

이에 반발해,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대안 동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학자 바바라 G. 워커(Barbara G. Walker)가 기존의 동화를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다시 쓴’ 동화 모음집 『페미니스트 동화(Feminist Fairy Tales)』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는 『흑설 공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워커는 기존 동화에서 남성은 힘, 재력, 권력을 가진 강한 존재로 묘사된 반면, 여성은 한결같이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 놓인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왕자에게 구원을 받아 행복한 삶을 얻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워커는 자신의 동화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고 꿈을 성취하는 여성들을 제시하려고 했다.

『페미니스트 동화』에는 ‘스노 나이트’나 ‘추녀와 야수’ 등 다시 쓴 동화들이 수록돼 있다. ‘백설 공주(Snow White)’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각색한 ‘스노 나이트(Snow Night)’에서는 백설 공주의 못된 계모 왕비가 현명하고 선량한 마녀로 변모해 악인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고 이웃 나라 왕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미녀와 야수’의 대안 동화인 ‘추녀와 야수’에서는 못생겼지만 마음 착한 막내딸이 야수와 진실한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얼굴엔 천연두를 앓아 얽은 자국이 남은 데다가 뚱뚱하고 척추 장애를 가진 추녀로 묘사된다. 야수에게도 잘생긴 왕자로 변신하는 꿈 같은 마법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추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은 외모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동화들은 이른바 ‘올바른 동화’라고 일컬어지며, 페미니스트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스노 나이트’는 공주와 왕비의 기본적인 갈등 구조를 없애버렸다. 백설 공주의 계모는 외모에 집착하여 질투하고 상대를 해치려는 기존의 부정적인 여성상 대신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추녀와 야수’의 경우에도 외모지상주의를 깨부수고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에만 집중한 결과, 이들 대안 동화에서는 극적인 재미와 반전이 빠지고, 상투적이고 뻔한 모럴리즘(moralism)과 무미건조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이야기’의 필수 요건인 갈등 구조를 제거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낸 것이다.

일러스트=토끼풀



옛이야기는 과거 역사의 특정 시대나 사회의 가치 체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편할 수 있다. 마땅히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현대의 잣대로 판단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화나 민담은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축적해 온 삶에 대한 통찰과 가치 있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단순히 황당한 환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옛이야기에는 다양한 삶의 문제,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 인류 공통의 보편적 원형(archetype), 어둠, 가혹함, 부정적인 면, 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동심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 사회의 밝고 즐거운 측면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동화는 고약한 계모란 가부장제 사회의 부정적 여성관을 반영할 뿐이며,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제의 세상과 윤리적 이상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착한 계모도 있지만 나쁜 계모도 있는 법이다. 외모지상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외모는 종종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옛이야기는 삶의 부정적 측면과 가혹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대면하게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 과정을 보면서, 어린이들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게 한다.

페미니즘 동화, 대안 동화, 이런 것들은 우리가 그동안 익숙해 있던 가치 체계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 새로운 방향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 영화는 한 방향만 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이야기’가 가진 고유의 즐거움과 문학적 특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른바 ‘올바른 동화’라는 일방향 가치에 의한 동화 죽이기는 독선과 무지의 소치다. 페미니스트 동화의 착한 스토리 플롯, 그리고 선함과 올바름에만 집착한 공허한 해피 엔딩은 매우 억지스럽다. 어차피 인간의 삶에서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라면, 왜 마녀까지도 착해야만 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