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유럽을 여행할 때, 현지인들이 ‘한국 아줌마’인 나를 ‘마드모아젤’ 혹은 ‘시뇨리나’, ‘세뇨리타’라고 부르는 것이 참 듣기 좋았다. 아시안이 백인의 외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안이기 때문에 이런 호사도 누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호칭들이 유럽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공식 문서에서 Mademoiselle을 없애고 Madame만 사용하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도 각각 Signora, Señora로 통일되는 경향이 강하다. 영어권에서도 Miss와 Mrs.를 통합해 Ms.를 쓰는 추세다. 남성에게는 Mr.나 Monsieur 하나만 사용하는 것과 달리, 여성만 결혼 여부에 따라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삶을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의 기준으로 구분하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잣대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언어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점은 아쉽지만, 원칙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찬성한다.
20세기 후반 이후 가속화된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은 차별을 줄이고 약자를 존중하자는 중요한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언어에서도 PC 운동이 나타나면서, 성차별적·인종차별적·장애인 비하적 표현을 줄이고, 보다 ‘올바른’ 언어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인권 감수성을 높이고 혐오 표현을 제어한다는 점에서 PC주의는 확실히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글을 쓰다 보면 PC주의가 언어를 지나치게 정화하고 관리하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언어의 다양성과 표현력, 감수성을 위축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싶다.
‘육감적’이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보자. TV에서 어느 여성 아나운서가 패널에게 이 말은 반여성주의적 표현이니 쓰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 단어는 몸매나 외모에서 ‘성적 매력을 강하게 풍기는’, ‘관능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어로는 뭐가 있을까? ‘매혹적인’, ‘매력적인’ ‘강렬한’? 이 단어들로는 그 미묘한 감각적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육체적 관능미, 성적 매력을 당당하게 찬미하는 현대 사회에서 ‘육감적인’이란 단어는 금기시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성차별, 성적 대상화, 성범죄라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들이댈 메스를 엉뚱한 언어 검열에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장님,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난쟁이 등도 비속어, 차별어로 분류돼 있다. 봉사, 장님은 원래 존칭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며 비하의 의미로 변질되었다. 요즘은 ‘시각장애인’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전에 피터르 브뤼헐의 <The Blind leading the Blind>에 대한 글을 쓰려다 제목 때문에 난처한 적이 있다. 우리말로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야 하나?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끌다>라고 번역해야 하나? 첫 번째는 무미건조하고, 두 번째의 경우, ‘눈먼 자’ 자체는 비하어가 아니지만, 맥락에 따라 낮잡아 부르는 의미가 될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렇다고 장님이나 소경을 쓰자니 몰매 맞기 딱 좋을 테고.
‘귀머거리’, ‘벙어리’의 경우, 문학적 맥락에서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정서적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같은 작품들은 제목 자체에 장애인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인식과 문학적 감수성이 깃들어 있다. 이를 모두 ‘청각장애인’ 혹은 '언어장애인' 같은 현대적 용어로 바꾼다면, 과연 그 말들이 지닌 미묘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을까?
난쟁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단어도 마땅치 않다. ‘저신장인’이라는 대체어가 제안되지만, 특정 신체장애의 의미를 명확히 담지 못한다. ‘눈뜬장님’,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과 같은 절묘한 관용구도 이제는 사용하지 못한다. ‘눈뜬장님’을 ‘진실에 대한 시각장애인’으로 바꾸는 순간, 맛깔난 문학적 생동감과 은유의 힘은 사라진다. 전통과 관습을 현대의 가치에 맞게 모조리 뒤엎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대한 무모한 파괴 행위다. 이 말들을 그대로 쓰자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인 언어의 PC주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내 책 <뜻밖의 미술관>에서는 18세기 프랑스 여성 화가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브룅을 다루면서, 처음 한번만 정식 명칭으로 쓰고 이후부터는 약칭인 ‘마담 르 브룅’으로 표기했다. 번번이 Élisabeth Louise Vigée Le Brun이라는 긴 이름을 쓰기가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당대 문헌에는 'Madame Le Brun', 'Vigée Le Brun', 'Mademoiselle Vigée' 등이 혼용되었으며, 18세기 당시 ‘마담 르브룅’은 사회적 관습에 따라 통용되는 규범적 호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비난의 소리가 나왔다. '마담 르브룅'이 시대착오적이며 여성주의에 반한다는 이유였다. '마담 르브룅'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대에 존재했던 여러 호칭 중 하나였다. 역사학과 미술사학에서는 과거 인물을 언급할 때 당대의 사회적 맥락을 존중하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다. 현대의 관점을 과거에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을 시대착오(Anachronism)로 보기 때문이다.
지나친 언어의 PC는 언어의 다양성과 창의적 표현을 위축시킨다. 시, 소설, 비평 등에서는 날카로움, 풍자, 그리고 인간 경험의 어두운 부분을 직시하는 표현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단어가 금지되고, 작가 스스로도 검열의 압박을 느끼게 된다면, 언어의 생동감은 소멸되고 언어문화는 평범하고 단조로워질 것이다. 차별어를 순화하려는 방향성은 바람직하나, 그 가치가 언어에 대한 지나친 통제와 검열로 이어지는 지금의 현실은 문제가 많다. 차별어를 줄이는 것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 사이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