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지 Jan 21. 2020

누가 왜 이들을  라이벌 프레임에 가둬 버렸나?

ㅡ 18세기 프랑스 궁정의 라이벌, 마담 르 브룅과 라비유 귀아르



18세기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두 여성 화가



동시대의 여성 화가인 아델라이드 라비유 귀아르(Adélaïde Labille-Guiard 1749-1803)와 마담 르 브룅(Élisabeth Vigée-Le Brun, 1755-1842)의 라이벌 관계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고, 미술사에 있어서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이기도 하다. 1783년 두 사람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던 단 4명의 여성들 가운데 있었다. 두 사람은 매년 살롱전에 참여하고 유럽 곳곳에서 전시회를 열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등, 당시 여성 화가로서는 대단히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둘 다 궁정 화가로서, 마담 르 브룅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였다면, 라비유 귀아르는 왕의 숙모인 마담 아델라이드와 누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두 여성 화가는 나이도 비슷했고, 탁월한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프랑스혁명 후 두 궁정 화가의 운명도 같이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혁명을 피해 왕족과 왕당파 귀족들은 프랑스를 탈출하거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고, 그들은 앙시앙 레짐의 왕족과 귀족 계급에 빌붙어 호화로운 생활을 한 적폐 세력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마담 르 브룅은 목숨의 위협까지 받을 지경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많은 불륜과 도박 스캔들로 부패하고 무능한 군주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국민들에게 낙인찍혔고, 마담 르 브룅은 그녀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왕비를 미화하는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 화가였기 때문이다. 결국 마담 르 브룅은 해외로 도주해 12년간 유럽 각지를 떠돌았고, 라비유 귀아르도 프랑스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깊은 타격을 입었다. 고국에 남은 라비유 귀아르는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열렬한 혁명 지지자인 자크 루이 다비드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미술가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그녀가 그린 왕족 초상화는 압수되어 소각되기도 했다.



마담 르 브룅과 라비유 귀아르



1787년 살롱전의 두 그림

ㅡ 마담 르 브룅과 라비유 귀아르의 초상화 대결



1787년 살롱전에는 마담 르 브룅의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와 라비유 귀아르의 마담 아델라이드의 초상화가 같은 줄에 나란히 걸렸다. 크기도 같았다는 점은 두 여성 화가의 경쟁 구도를 부각하기 위한 고의적인 의도로 보인다. 마담 르 브룅은 왕비의 자애로운 모성애를 부각함으로써, 온갖 부도덕한 스캔들에 고통받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고, 라비유 귀아르는 루이 16세의 숙모를 통해 궁정의 미덕과 위엄을 표상하려고 했다.


마담 르 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1787, 271 x 195 cm, 베르사이유 트리아농 궁


라비유 귀아르, <마담 아델라이드>, 1787, 캔버스에 유채, 271 x 194 cm, 베르사이유 궁(출처 Wikimedia)



두 여성 화가의 라이벌 프레임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서로에게 적대적인 라이벌이었을까? 사실 두 사람이 서로 경쟁자로 의식했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 구도로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은 그녀들 주변의 남성 미술가들에 의해 적으로 프레임이 짜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왜 그녀들을 경쟁자로 만들어버렸을까?


비평가들은 그들의 재능을 비교하며 흥밋거리로 삼았던 것 같다. 사실 여성이 드문 미술계에서, 그것도 아카데미 회원이자 궁정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두 여성 화가의 등판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비평가들은 각각 두 사람의 편으로 갈라서서 그들을 평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경쟁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심지어 마담 르 브룅이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것과 라비유 귀아르가 평범한 외모를 가진 것에 대해서도 비교했다. 마담 르 브룅이 아름다운 외모와 사교적인 성격으로 왕비와 귀부인들의 호감을 샀던 것은 사실이다. 대세는 마담 르 브룅의 승리로 기울어진 듯 보였다. 어쩌면, 라비유 귀아르는 열심히 노력해 마담 르 브룅을 능가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한편, 두 여성의 궁정 화가로서의 직책과 성공에 상당한 질투와 분노를 느낀 남성 미술가들이 있었다. 때는 여성의 능력과 재능에 불신하는 남성 우월적 사회 가치관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였다. 그들은 여자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를 꿰차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부당하다고 불평했다. 아마도 궁정 화가로 자신들보다 잘 나가는 두 여성을 시기, 질투한 남성 미술가들이 그들을 불화하게 만들고 곁에서 구경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두 여성 화가에게 오물을 뒤집어 씌웠다. 행실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공격, 그리고 재능에 대한 의문 제기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이 비열한 남자들은 마담 르 브룅이 고객들과 잠자리를 했다는 둥,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다는 둥, 라비유 귀아르가 바람을 피웠다는 둥 근거 없는 루머를 퍼트리기도 했다. 그 목적은 두 화가의 성공적 경력을 훼손하고 불신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파리 예술계에서 이런 악의적인 소문이 늘 두 여성의 주변을 맴돌며 괴롭혔다.


또한, 그들은 여성이 그토록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므로 남성 화가가  도와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라비유 귀아르는 살롱에 전시한 작품 하나가 그의 스승 뱅상이 도와줬다는 혐의를 받았고, 그녀는 이에 대응하여 저명한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직접 평가를 하게 해 비난을 잠재운 적도 있다. 마담 르 브룅의 경우, 그녀의 그림은 정말로 훌륭했기 때문에 이에 충격을 받은 남자 미술가들은 그녀를 흠모하는 메나조라는 남성 화가가 그림을 그려준다고 헛소문을 냈다. 이들이 퍼트린 무례한 가십과 중상모략은 파리의 대중 언론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고, 대중은 이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으며 즐겼다. 현대의 황색 저널리즘이 유명 배우의 사생활을 엿보고 루머를 퍼트리고, 대중은 이를 비이성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매우 유사했다.


마담 르 브룅은 화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잠깐 받은 것 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순전히 자신의 야망과 노력으로 성공한 여성이다. 라비유 귀아르는 저명한 화가들에게 사사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누드 실기 수업을 받을 수 없었던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 미술가로 성공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고 누드 수업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남자들도 거두지 못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힘겹게 화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한 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의심되었고, 심지어 부당한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