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짐
중학교 입학 후 앞자리가 아니면 칠판 글씨 위에 슬그머니 안개가 낀다. 2학기에 칠판 글씨는 더 뭉개졌고, 뭉개질수록 나는 작은 눈을 쥐어짰다. 나는 집에서 TV 앞으로 계속 전진했고, 이읔고 TV 앞에서 알짱거렸다. 결국 동네에서 안경을 맞췄다. 안경 쓴 나를 보고, 부모님은 어김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TV 그만 보랬지!' 그 후로 겨울이면 내 또 다른 눈에 김이 서린다.
대학에 들어가서 겉 멋에 소프트 렌즈를 샀다. 안경과 다름없이 잘 보인다. 뛸 때 안경 걱정이 없다. 렌즈가 편리하다. 진작 쓸걸...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눈이 작아서 인지, 요령이 없어서 인지 렌즈를 눈에 넣는데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참을성 있게 여러 번 시도 끝에 넣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손에 익지 않는다. 아침마다 불편하다. 어느 날 술 먹고 렌즈채로 잠들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당시 렌즈를 끼고 자면 렌즈가 눈 뒤로 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넣기도 힘든 것이 이유지만, 위험하다는 핑계로 렌즈를 책상 서랍에 던졌다. 렌즈가 눈에는 반항하더니, 서랍에는 순하다. 후로 겨울엔 다시 눈에 김이 서린다.
작년이다. 후배들이 안경을 벗고 나타났다. 잘 보인단다. 라식 수술에 흘깃했다. 안경 비용과 비교해도 가격도 그리 높지 않다.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했더니 내 나이에는 라식이 노안을 가져올 수 있단다. 벌써 노안이라니 겁이 났다. 언젠가 올 손님이지만 굳이 내가 먼저 데려올 생각은 없다. 올 겨울에 어김없이 눈에 김이 서린다.
기한 있는 보고서인데 진도가 더디다. 나이 한 살 더 먹어서 일까, 실력 부족일까 아니면 원래 어려운 걸까! 머리와 글이 막히면 담배로 뚫는다. 막히는 만큼 뚫수밖에 없다. 뚫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에서 돌아오면 안경에 다시 김이.. 안경 닦기가 귀찮아서 앞이 안보이면서 책상 위의 커피를 더듬었다. 이런, 커피가 책상 위로 쏟아졌다.
에이, 뭐야! 안경을 벗고 더듬더듬 티슈를 찾아 치웠다. 짜증 난다. 다시 뚫었다. 뚫으니 맘이 나아진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안경의 김도 어김없다. 의자에 앉아서 김이 몇 분 후에 사라지는지 궁금하다. 스마트폰의 스톱 왓치를 켰다. 30초가 지나간다. 1분이 지나간다. 2분 20초가 걸렸다.
짧은 시간인데, 이 생각 저 생각이.. 앞이 흐릿하니 커피를 쏟을 수밖에, 3분만 기다렸으면... 더 나아간다. 내가 지난해 흐릿한 채로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던가... 일로 기분이 상해 고객에게 정중하지 못한 일, 자존심으로 동료에게 억지를 부린 일 그리고 꼬맹이의 실수에 큰 소리 등. 내가 가만히 맘속의 김이 없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안경의 김이 앞을 흐리는 것같이 맘속의 김도 그렇다는 것을.... 안경의 김이 오래가지 않는 것처럼 맘속의 김도 그렇다는 것을... 안경의 김으로 고객, 동료, 가족에 대한 맘을 다잡는다. 이맘을 잊는다면 안경의 김이 다시 일깨우기를 믿든다.
PS : 끝까지 와주셔서 감사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