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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Jan 09. 2022

뱅크스 소나무의 생존 전략

왜 기초 과학의 저변을 국가가 보존해야 하는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산불은 때로는 산 전체를 태우기도 한다. 화마가 휩쓸고 간 산의 생태계는 얼핏 보면 절멸한 것처럼 보인다. 동물이고 식물이고 모두 타버리거나 도망갔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화마 속에서도 버티고 살아남은 강인한 식물이 있다. 예를 들어 뱅크스 소나무 같은 경우, 솔방울은 평상시에는 열리지 않다가 주변 온도가 200도 이상으로 올라갈 때만 열리는데, 산불이 발생한 이후 주변에 재만 남은 토양에 떨어져 오히려 우세종이 되어 그 산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전략이 되기도 한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1970년대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강력하게 드러낸 이후, 1980년대는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990년대-2000년대 사이 한국이나 대만 같은 후발 산업 국가들에게 뒤를 잡히면서 조금씩 그 존재감이 퇴색되었다. 지금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기업은 한 두 개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업종과 점유율 면에서 점차 쇠퇴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 폐쇄적인 일본 정부마저도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살리기 위해 해외 업체들에 대해 자국의 문호를 완전히 개방했으며, 보조금까지 주면서 유치에 힘쓰고 있을 정도다. 작년 하반기에는 이러한 전략이 통했는지, TSMC가 일본의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소니 공장을 인수하여 대 일본 자동차 반도체 시장과 이미지 센서 제조 시장을 타깃으로 삼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없고, 자국의 반도체 산업은 쪼그라들어 이제는 해외 업체와의 협력 없이는 자생력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로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반 세기 동안 애써 이룩한 거대한 산에 산불이 생겨났고, 그 결과 남은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반도체 산업에는 여전히 뱅크스 소나무의 솔방울이 남아 있다. 어제 시립대 물리학과 박인규 교수님의 포스팅을 공유하면서 미국의 물리학과 전공생이 다시 반등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기초 과학의 최후의 보루는 국립대라는 내 주장을 함께 전했다. 왜 국립대가 기초 과학의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는지는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옆 나라 일본의 물리학과가 얼마나 강력하게 기초 과학의 보루가 되어 주고 있는지만 살펴봐도 답이 나온다. 


2022년 1월 현재, 홈페이지 기준, 일본의 대표적인 국립대인 동경대의 경우, 물리학과 패컬티 (정, 부, 조교수 및 lecturer)는 총 151명 정도다. 도호쿠대의 경우 물리학과 패컬티는 155명 정도다. 오사카대는 102명, 교토대는 50명 정도다. 다른 일본의 국립대를 모두 조사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50-100명, 많으면 150명 정도 되는 패컬티가 재직 중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반해 한국의 국립대는 어떤가. 서울대는 이제 국립대는 아니지만 어쨌든 포함시켜 보면 서울대 물리학과는 39명, 부산대 물리학과는 19명, 전북대 16명, 전남대 16명 (강의교수는 9명), 충남대 18명 정도다. 서울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립대는 15-20명 내외의 패컬티만 재직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공계 특화인 KAIST마저도 36명 정도의 패컬티만 재직 중이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일본의 국립대 물리학과 패컬티는 대략 한국의 두 배 정도가 되어야 정상일 것으로 보이는데,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 수준이다. 특히 도호쿠대의 150명을 상회하는 패컬티는 충격적인 수준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따진다면 (굳이 따진다면) 대략 경북대 정도 되는 위치의 학교일 텐데, 경북대에 비해 7-8배 이상 많은 패컬티가 재직 중인 것이다.


물론 패컬티가 많다고 능사는 아니다. 또한 일본 역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낮은 출산율로 인해 사회가 급속도로 노령화되고 있고, 이공계 기피 현상, 기초과학 기피 현상이 심각하긴 매한가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대가 이렇게 기초 과학의 패컬티를 강력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보존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 우선적으로 기업이나 사립 연구소로 가기 어려운 기초 과학 박사 학위자들의 잡마켓 (물론 학계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학위자들)이 확장된다는 것은 물론, 초장기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일본 특유의 문화 (대를 이어 일에 집중하는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제자들에게 안정적인 연구자로서의 역할이 부여되면 장기적인 연구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패컬티가 많아지면 좋은 것은 또 있다. 같은 분야의 패컬티가 많아지면 (선의의) 경쟁이 생겨 연구 성과의 질이 높아질 수도 있고, 비슷한 전공 패컬티들이 모여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다. 또한 다른 분야의 패컬티가 많아지면 융합 연구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심지어 새로운 필드의 학문도 탄생할 수 있다. 전공의 유사도와 상관없이, 일단 N이 증가하면 상호작용 빈도는 N^2에 비례하기 때문에, 30명이 있는 학과와 150명이 있는 학과는 5배의 차이가 아닌 25배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된다.


어쨌든 일본은 수도권의 국립대든 지방의 국립대든, 이렇게 고지식할 정도로 국립대들이 물리학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고 있다. 그것이 이론 물리든, 응용 물리든, 대형 시설이 필요한 물리든,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 물리든, 일단 '물리학자'를 핵심 자원으로 보기 때문에 형성된 문화일 것이다. 이러한 국립대가 일본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는 한, 일본은 언제든 잃어버린 반도체 산업에서 권토중래할 수 있다. 뱅크스 소나무의 솔방울이 뜨거운 불길 속에 살아남아, 마침내 껍질을 열어 잿더미가 된 산업의 토양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면 오히려 그 재를 퇴비 삼아 새로운 산업의 꽃이 피어날 가능성은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다. 애초 반도체 산업의 주축을 이루는 요소 기술들의 상당수가 물리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해 보면, 이는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차세대 반도체 기술은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기술들이 하루아침에 돈오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점수가 있고 나서야 돈오가 있는 것이고, 점수가 있고 나서야 돈오의 의미가 자리 잡히는 것이다. 물리학은 다른 산업 분야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반도체 산업에서는 바로 그러한 점수를 감당하는 핵심 토양이 된다.


차세대 반도체의 향방을 가를 요소 기술 중에 하나는 바로 비실리콘 소재다. 실리콘은 지난 반세기 넘게 반도체의 핵심 소재로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실리콘의 한계로 인해 진보가 더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화합물 반도체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보다 더 먼 시각에서는 양자컴퓨터의 하드웨어가 될 수 있는 저차원 소재, 뉴로모픽 하드웨어가 될 수 있는 유연 소재, 스핀을 이용할 수 있는 다강체 소재 등이 다음 후보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가 정보 처리 미디엄이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이들 소재의 기본적인 물리적 특성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밑바닥 원리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연구하는 분야가 양자물리학, 고체물리학, 광학, 통계물리학 등이다. 굉장히 고전적인 분야지만 여전히 이러한 분야에서 파고드는 이론들, 수학적 모형들, 시뮬레이션 툴, 근사 방법론 등은 소재의 특성을 이해하고 소자로서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핵심 지식을 제공한다.


일본의 국립대에 설치된 물리학과 패컬티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에너지 이론 물리학, 핵물리학, 광학, 나노 물리학, 생명 물리학, 포토닉스, 반도체 물리학, 고체 물리학, 가속기 물리학, 통계 물리학 등 면면이 다양하다. 특히나 일본 국립대의 특성은 국립대 패컬티만이 수주할 수 있는 정부 과제가 있다는 것인데, 이들 과제의 상당수는 이론 물리학뿐만 아니라 응용 물리학에도 포진되어 있으며, 응용 물리학은 여전히 일본의 산업계와 협업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적 성과는 언제든 일본의 산업 중흥으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즉, 국립대에 설치된 물리학과에서 안정적인 물리학 연구 성과들은 언제든 산업으로 건너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비록 과거의 영화가 빛을 바랐고 산업은 쪼그라들었지만, 언제든 뱅크스 소나무의 솔방울처럼 일본의 강력한 물리학 저변에서 뒷받침되는 돌파구가 언제 어떻게 일본을 다시 차세대 반도체 산업의 키 플레이어로 되돌려 놓을지 모를 일이다. 일본 정부가 이것을 획책하기 위해 일본의 국립대에 대형 물리학과들을 남겨 둔 것은 아니겠지만, 쌓여 가는 기초 과학의 지식이라는 것은 국립대가 그것의 최후의 보루를 자처하는 한, 쉽게 없어지지 않으며, 그렇게 누적된 지식의 생태계는 결국 어느 계기로 산업의 꽃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을 앞지르며 세계적인 반도체 강국이 되었다고 뿌듯해하지만, 사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마냥 그러고 있기 어려운 상황이다. 앞서 서술했듯 한국의 국립대에 설치된 물리학과 패컬티는 절대적인 숫자가 너무도 모자란 상태이고, 이는 다양성과 critical mass 양면에서 매우 불리한 여건임을 의미한다. 각 지역의 거점 국립대라는 곳에서 물리학이라는 정말 중요한 기초 학문에서 마저 패컬티가 20명도 채우기 힘든 수준이라면, 그 학문을 추구하려는 후속 세대가 보기에도 그 분야는 국가에서 별로 지키려 애쓰는 분야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똘똘한 학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탈물리' 하려 애쓸 것이고, 설사 학문적 의지를 살려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므로 박사는 언감생심, 겨우겨우 석사 학위 받고 대기업에 취업하기 바쁠 것이다. 생태계가 형성되기 어려우니, 교수들의 연구에도 진전이 있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는 랭킹과 평가에 민감한 대학 경영진 혹은 교육부 입장에서는 학부 구조조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물리학과는 없어지고 교양학부로 통폐합될 수도 있고, 일부 전공은 공대로 흡수되고, 일부 전공은 폐과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기적 프로젝트의 기획이나 수행은 꿈꾸기 어려우며, 세대를 이어가며 할 수 있는 연구는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깝다. 설사 패컬티가 되더라도 경험이 일천한 주니어 패컬티가 수주할 수 있는 연구비의 규모는 너무 작고, 장기적 프로젝트의 평가는 정량 평가에 기반을 두고 있어, 행여나 큰 논문을 써 보려 꿈꾸는 주니어들은 평가 제도에 지레 겁먹어 질리기 십상이다. 다양성이 제한되니 융합을 통한 학문의 발전도 꿈꾸기 어렵고, critical mass가 만족되지 않으니, 역량을 집중하여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하는 연구를 하기도 불가능하다.


지금은 산업에서의 경쟁력이 기초 과학에서의 연구 경쟁력을 한참 앞서는 상황이니, 한국에서 기초 과학의 누적된 지식에 대한 중요성을 아무리 외친다고 한들, 그것이 잘 체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빠르게 한계로 치닫고 있는 반도체 기술의 돌파구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물리학에서 다시 찾아야 하고, 그 와중에 쌓아둔 지식 기반이 없다면 그 돌파구는 결국 외국에서 찾은 것을 사 와야 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초 과학 저변이 충분히 갖춰지기도 전에 국가 역량을 주로 산업 개발에 쏟다 보니, 산업 우선적인 정책, 경제성 평가 우선 정책,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 기준 평가 우선 정책이 자리를 일찍 잡게 되었고, 그래서 기초 과학이 충분히 자생력을 갖출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 한국에게는 불운한 부분이다. 산업 우선 정책은 한국을 과연 단시일 내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게 만든 동인이 되어 주기는 했으나, 이제 그 이후의 발전에 대해 이용할 수 있는 전략이 바닥나고 있는 상황에서 왜 우리는 다시금 기초 과학을 제대로 돌아봐야 하는지를 지금이라도 늦었다 한탄하지 말고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지겨울 정도로 부러워하고 지겨울 정도로 원인을 분석하지만,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ibs가 생기고 거대 기초 과학 연구단이 속속 형성되면서 그나마 조금씩 저변을 갖춰가고 있지만, 사실문제는 ibs가 아니다. 그냥 지거국도 아니고, 평범한 국립대에서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저변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드시 거대 연구단, 거대 과제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또한 bk 과제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국가 과학자로 지정되지 않더라도, 명예로운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연구 덕후들이 기초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더 많은 과학자들, 연구자들, 특히 주니어 연구자들에게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것의 시작이 국립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그 국립대가 지역에서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면서 시대와 정권의 바뀜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내 독창적인 주장도 아니고, 이미 많은 이들이, 선배 학자들이 수십 년 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 온 이야기들의 연장선일 뿐이다. 나는 비록 물리학과 교수는 아니지만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물리학과 맞닿은 분야가 대부분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이 수십 년 간 공들여 연구해 온 방법론과 이론을 매우 편하게 응용하고 조합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만큼 나의 연구는 기초 과학을 외롭게 연구해 온 분들의 노고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다. 이들이 쌓아 온 지식의 토양은 대부분 외국의 학계에서 형성된 것들이지만, 조금씩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토양에서 나온 이론과 방법론들이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을 간혹 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빛은 얼마 안 있어 사그라들 것임은 분명하다. 뒤를 이을 세대가 점점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것은 이제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냥 닥치고 지방의 국립대, 적어도 거점 국립대부터라도 패컬티를 지금의 2-3배 수준으로 확대하여 젊은 패컬티들이 더 안정적으로 더 폭넓게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줘야 한다. 전국 10개의 지거국 물리학과에 평균 20명 정도의 패컬티를 추가로 채용하고 이들의 인건비와 연간 직접 연구비 1억 원 정도만 배정해도 200명 패컬티의 연구 지원을 위해 연간 400억 원 밖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대학원생, 포닥을 채용하고 시설비를 갖춘다고 해도 연간 도합 1000억 도 들지 않는다. 나라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들었다고 자부하면서도, 산업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이 정도 투자를 감내하지 못할 나라라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앞으로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경쟁력 기반의 대부분은 제조업에서 나올 것이다. 지금은 문화 산업으로 융성하고 있지만, 어쨌든 한국 같은 강소국의 기반에는 제조업이 있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조업은 그 특성상 기술 개발과 투자가 경쟁력의 핵심이며, 후발 주자들과의 경쟁, 선발 주자들의 견제 속에 끊임없는 혁신을 해야 겨우겨우 그 위치가 유지된다. 기초 과학의 저변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도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당분간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도 겨우 한 세대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노하우는 기초 과학에 기반을 두어야 단단해지는데, 그것을 담당할 생태계에는 이미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화마 이후, 다시 잿더미 속에 뿌리를 내릴 뱅크스 소나무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역 국립대를 기초 과학의 본산으로, 최후의 보루로, 후속 세대의 보금자리로, 젊은 학자들의 울타리로, 국가 핵심 경쟁력의 최후의 씨앗으로, 대형 과제와 초세대 연구의 요람으로 제대로 만들기를 바란다. 이는 정권의 문제도 아니요, 정부의 정책 문제도 아니다. 그냥 한국이라는 나라가 결정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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