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석준 Seok Joon Kwon Mar 17. 2024

방사능에 내성을 갖는 선충이 존재할까?

체르노빌 지역에서 살아온 선충의 이야기

체르노빌 사고는 인간이 원자력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이후 지금까지 겪은 원자력 사고 중 최악의 그리고 최대 규모의 사고다. 1986년 4월 말, 당시 소련 연방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주 체르노빌에 위치한 원전에서 일어난 이 사고는 냉전 시대 막바지에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위기와 국가 차원의 발전 동력 확보의 한계로 치닫고 있던 소련의 붕괴에 이른바 막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고의 원인은 여러 원인이 복합되어 구성된 것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제대로 된 안전장치와 제어 기술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가동 실험을 한 끝에, 냉각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제어 불가 상태에 빠진 원자로가 폭주하여 끝내 폭발한 것이 꼽힌다.


이 사고로 인해 체르노빌 일대는 물론 소련 서부 지역과 동유럽, 심지어는 북유럽 전체와 서유럽 상당수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 동부 포함)와 아시아 일대까지 크고 작은 정도로 방사능 오염 영향이 생겨났다. 폭발로 인해 최소 500경 베크렐 이상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분산되었는데, 이는 대략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500배 정도 되는 규모이며, 이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은 IAEA에 따르면 수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는 겨우 30명) 


이 불행한 사고로 인해 체르노빌 일대 반경 수십 km 지역은 인간은 물론, 동물도 살 수 없는 지역처럼 변했고 (면적으로는 약 4,200 km^2 정도가 심각 오염 지역으로 분류), 러시아,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고 지점 반경 30 km 이내의 지역을 체르노빌 출입제한 구역 (CEZ)로 지정하여 지금도 민간인들의 출입은 허가받은 사람들만 소수 단위로 출입이 허가되는 방식으로 통제되고 있다. 방사능 영향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 한 수많은 생물들의 유전자 변형에 의한 돌연변이 가능성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우려해 왔으며, 이는 일부 호사가들의 관심을 자극하여 고질라 같은 초거대 생물의 출현 가능성을 논하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이제 거의 40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지역은 그 사고의 불행함과는 별개로, 모종의 이유로 인해 방사능이 고농도로 유출된 지역에서 생물들의 변화를 수 세대 혹은 수십 세대에 걸쳐 관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실험적'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생물학자들은 이미 90년대부터 이 지역의 동물 샘플들을 수집하여 그들의 유전자 변형을 추적해 온 연구를 하고 있기도 했고, 특히 사고 이후 초반 10년간은 집중적인 추적 조사가 있었는데, 설치류 같이 비교적 세대 주기가 짧은 생물들에서는 보통 진화 속도의 수십만 배 정도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 같은 일부 유전자 변화가 관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일부 지역에서 갑상선암 발병 빈도가 높아진 것 외에는 특별한 유전적 변이가 관찰되었다는 보고는 거의 없었다. 또한 그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포유류들은 자체적으로 다시 생태계를 복구한 것처럼 관찰되었으며, 실제로 2015년 Current biology에 실린 연구에서는 해당 지역에 오히려 야생 동물 개체군수가 사고 전보다 더 늘어났을뿐더러, 곰, 늑대부터 순록에 이르는 먹이사슬도 복원되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체르노빌 지역에서 발견된 선충의 이미지 (출처: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4793121)

오히려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세대교체 주기가 지극히 짧은 미생물들이었다. 예를 들어 선충의 일종인 예쁜꼬마선충 (C. elegans) 같은 생물들의 생애주기는 3-4주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포유류에 비해 1/10-1/100 수준이며, 따라서 같은 기간 동안 포유류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세대가 거듭되어 유전자 변이를 추적 관찰하기가 더 용이하다. 더구나 선충은 새포 숫자가 딱 959개로 일정하며, 다세포 생물 중 DNA 서열이 모두 밝혀진 생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유전자 레벨에서 그 영향을 정밀 분석하는 것에는 최적화된 표준 생물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3월 5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Environmental radiation exposure at Chornobyl has not systematically affected the genomes or chemical mutagen tolerance phenotypes of local worms'라는 제하의 논문*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314793121

(같이 보면 좋을 해설 기사: https://phys.org/.../2024-03-tiny-worms-tolerate...)


에서 미국 뉴욕대(New York Univ.)의 Matthew Rockman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체르노빌 원전사고 오염 지역 일대에서 2019년에 채집된 선충(Oscheius tipulae) 15마리의 유전 정보를 분석하고 5마리의 평범한 선충 샘플과 대조 분석한 결과, 이들의 DNA는 방사선에 의해 딱히 변형된 흔적을 보이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그것이 방사능에 의해 DNA가 손상되었다가 모종의 회복 능력으로 인하여 복구되었다기보다는, 애초부터 손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임도 확인하였는데, 이는 해당 선충의 상당수가 체르노빌의 고농도 방사능에 의해 초기에 대량멸절되었다가 살아남은 소수의 돌연변이 개체 (즉, 방사능에 내성이 있거나, 손상된 DNA를 복구할 수 있거나 하는 등의 기능이 획득된 개체)가 진화를 거듭하며 방사능 내성을 획득한 자손이 아닌, 그저 예전부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선충들과 별 차이가 없는 개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선충이 이러한 방사능 저항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선충을 비롯한 미생물들이 방사능에 강하니, 포유류 같은 더 큰 동물들도 방사능에 내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 선충은 생애 주기가 짧으므로 방사능에 의해 변형된 DNA가 충분히 그 영향을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개체가 죽게 되는 특징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번에 PNAS에 보고된 이러한 관찰 사실은, 방사능이 생각보다 생물을 멸절시키는데 아주 특별히 더 강력한 요인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지구상 어딘가 천연 우라늄 광이 있는 고농도 방사능 지역에도 생물들은 나름 자체적인 생태계를 이루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은 방사능에 대한 내성을 오랜 세대 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획득했을 수도 있고, 애초부터 그러한 방사능의 세기가 해당 생물군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수준이어서 였을 수도 있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여 고려하면 지구 외에, 태양계 내부 혹은 외우주 천체 어딘가에서도 유기물 바탕의 신체와 유전자를 갖는 생물이 살 수 있는 조건은 더 넓어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생물들은 지구만 하더라도 굉장히 터프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매년 더 다양한 케이스를 발견하면서 확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심해 해저 열수구 근처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지역의 초고압 지역이나, 화산 지대 근처 유독한 가스가 가득한 지역이나, 극지방의 초저온 지역 등에서도 세대를 꿋꿋이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생물군이 지속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이제, 여기에 더해 방사능에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세대를 계속, 그것도 수백 세대 이상이나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생물이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생물들이 살 수 있는 이른바 habitable zone의 조건은 조금 더 느슨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일반적인 골디락스 존의 구성 요소 중에 방사능은 제한 조건으로 아주 강하게 작용할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방사능은 예전부터 돌연변이, 그것도 끔찍한 괴물이나 혼종을 만들어내는 가장 쉽고 확실한 요인으로 많은 다큐 혹은 창작 매체에서 묘사되어 왔다. 실제로 방사능 오염으로 많은 유전자 변형, 그리고 암 발생 케이스가 보고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생명의 위대함은 방사능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준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 그 너머에서 인간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데, 방사능에 대해서도 이는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아마 먼 미래 인류의 까마득한 후손이 외우주에서 성간 방사능을 에너지원 삼아 떠돌아다니는 형태의 외계 생물체를 발견한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프로젝트 헤일메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