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산업정책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이유
[Disclaimer: 저는 본문에 나오는 어떤 반도체 관련 국내 학회의 기술정책이사입니다.]
최근 내가 속한 어떤 국내 반도체 관련 K 모 학회의 포럼이 있었다. 형식은 포럼이지만 다각도에서 현재 특정 반도체 기술 분야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 그리고 산-학-연의 대응책에 대해 다 같이 고민하는 자리였다. 나는 발표자 겸 토론자로 참석했지만 내 발표보다 다른 전문가 분들의 인사이트 넘치는 발표에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생각을 얻어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학회의 포럼 장에서는 말미에 으레 청중과 패널 사이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다. (시간 관계상) 많은 질문들은 사전에 미리 익명 수집한 질문들을 추려서 중요한 질문들 군으로 정리한 것이지만 현장에서 즉문으로 나오는 질문들도 있다. 토론회 이후 이어진 QnA 시간 추린 질문, 즉문 질문 모두 중요한 질문들이었지만 내가 따로 글로 남기고픈 질문과 그에 대한 토론은 이것이다. 사실 이 질문과 응답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 반도체 업계에서 아주 오래된 난제 혹은 해결하기 어려운 숙원 같은 아이템이기도 하다.
이 질문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반도체 생태계 다변화하고 자립시킨다고 여기저기서 말들은 많고 정부도 과감한 정책 드라이브 건다고 한지가 한 두 해 된 일이 아닌데, 왜 여전히 한국의 수많은 반도체 소/부/장 중소기업들은 판로 확보가 어려워 매년 죽을 고비에 시달리는가? 이른바 대기업들이나 글로벌 OSAT(후공정) 전문 기업들은 국내 소/부/장과 왜 상생을 안 하는가?
사실 한 가지 오해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이나 OSAT 글로벌 대기업은 국내 소/부/장 업체와 기본적으로 상생을 하고 싶어 한다. 아니 상생하는 것이 어찌 보면 매우 중요한 전략이기도 하다. 반도체 생태계의 제일 끝단, 즉, 제조업에서 칩을 만드는 기업은 공급망이 매우 복잡하다. 소재, 장비, 부품 모두 공급망이 안정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특정 기업에 발목 잡힐 정도로 공급망에 병목이 생기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한다. 현재의 공급망에서 예를 들어 EUV lithography 같은 기술 품목은 대표적인 병목 지점인데, ASML의 독점 구도를 누군가가 확실히 깨드릴 수 있다는 혁신이 나온다면 아마 가장 먼저 그 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은 회사들도 이런 반도체 제조 대기업들이나 OSAT 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국내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을 무시하거나 관계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내 업체들이 공급망에 참여한다면 환영할 일일뿐이다.
그런데 국내 소/부/장 업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엔드단의 제조업체들은 말로만 상생을 외칠 뿐 막상 자신들의 제품을 들고 찾아가면 관심 가져주는 듯하면서 결국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공급망 취약 지점을 노리고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대등한 성능, 그리고 가격은 적어도 1/2 이하로 낮춘 제품을 들고 간다고 해도 결국 대량으로 채용하는 경우는 사실상 전무할 정도라고 불만들이 많다. 소/부/장 업체 대표들은 불만이 가득하다. 정부도 그렇고 산업계도 그렇고 반도체 생태계 중요하다고 해서 열심히 R&D 비용 투자해서 수년, 수십 년 집중해서 기술 하나 만들어 놨더니 결국 사주는 국내 기업이 없어서 말라죽거나, 죽기 싫어서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양측의 입장과 의견이 다를까?
예를 들어 대기업들, OSAT 업체들 입장은 이렇다. 국내 소/부/장 기업의 기술을 채용하여 일부 라인을 바꾸는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의당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설사 삼성이나 SK하이닉스, Amkor 같은 제조업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공정 라인에 어떤 회사 장비와 어떤 회사 소재를 쓸지에 대해 100%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메모리업체가 새로운 HBM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의 패키징 장비 업체의 장비를 대체하기 위해 다른 중소기업 제품을 사용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새로운 장비는 가격도 70% 수준이고 성능은 더 좋다. 그러면 그 메모리업체는 의당 그 장비로 더 좋은 성능의 메모리를 만들어 보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제품에 대해 막상 제품을 사줄 고객이 스펙과 QC를 트집 잡으면 가격 협상에서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특히 글로벌 대형 고객들 입장에서는 주문한 그대로 스펙이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제조 과정에 어떤 변수 (예를 들어 장비를 새로 교환)가 생겨 스펙 달성에 불안정성이 생길 것 같으면 인수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deal은 사실 제품 구매 업체와 반도체 제조 업체 사이의 구매 계약 당시부터 이미 계약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사항이기 때문에 제조 업체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제품 구매 업체를 설득시킬 정도로 확실한 스펙을 보이는 증거를 가져오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제품을 구매하려는 업체는 불확실성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그 증거라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양산 수준에서 확실하게 대체 가능한 수준의 장비, 소재, 부품이라는 증거를 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양산 수준은 적어도 12인치 웨이퍼 단위로 수백-수천 장 단위를 의미한다. 공정 노드마다 다르지만 웨이퍼 한 장에 적어도 1만 불 이상인 이 시대, 수백-수천 장 단위의 시험은 수백-수천 만 달러의 비용을 의미한다. 이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가? 삼성전자? 하이닉스? Amkor? 왜 이들 제조업체가 확실하지도 않을 신규 업체의 기술 검증을 위해 수십-수백 억 원을 투자해야 하는가? 그 업체가 자신들의 자회사도 아닌데? (물론 세메스 같은 업체들은 사실상 삼성전자의 자회사 격이어서 이야기가 조금 다르긴 하다.) 그러면 그 돈을 오로지 개발사가 내는가? 수십-수백 억 원의 개발비를? 물론 그럴 수 있는 업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국내 소/부/장 업체들의 연 매출은 수십/수백 억 원을 넘는 회사가 별로 많지도 않다. 하물며 스타트업은 매출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한 마디로 그 강력한 증거가 될만한 데이터 확보 자체를 감당할 돈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회사들은 그렇게 잘 굴러가는가? 그 회사들도 처음에는 다들 어려웠을 것 아닌가? 맞다. 처음부터 잘 나가는 회사는 별로 없다. 다들 일본의 소부장 업체들의 기술이 강력하고 여전히 글로벌 수준에서 지배력이 있다고들 알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일본 업체들 중에서 살아남은 회사들이 충분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업체들은 중간중간 비즈니스 영역을 계속 바꿨다. 대표적으로 JSR 같은 일본 소재업체는 70년대-80년대까지는 합성고무와 플라스틱 원소재가 주력이었지만 지금은 반도체 광화학소재(PR) 등이 주요 영역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절정기이던 80-90년대, 일본의 주력 반도체 제조업체는 10곳 가까이 되었고 이들은 글로벌 시장은 물론 팽창하는 자국 내수 시장, 특히 HPC와 가전, 그리고 자동차용 반도체나 통신 반도체 등에 맞춤형 반도체를 자신들의 팹을 통해 만들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각각의 제조사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협력사들의 기술 개발을 지원했고 협력사들은 그 회사에 특화된 소재, 부품, 장비를 제조하는 식으로 자립 기반을 넓혔다. 작은 규모로 시작한 소재 회사라고 하더라도 비즈니스 영역을 바꾸는 과정에서 파트너 대기업의 기술 지원과 개발 비용 지원이 있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여러 삽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소부장 업체들이 지속적으로 기술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정책적으로 R&D 지원을 한 것은 물론 인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일본 정부는 통산성 주도로 이미 70년대 후반에 VLSI 기술연구조합을 만들어 주요 반도체 제조업체와 소부장 업체들이 컨소시엄을 이루는 과정에 700억 엔 정도를 투입하여 지원하였다. 이 컨소시엄은 10년 후 한국 정부의 16메가 DRAM 산-학-연 공동연구개발사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아주 성과가 뛰어난 사업이었다. 일본 정부가 지원한 것은 단순히 업체들이 서로 네트워킹 되도록 만드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보다 실질적으로 생태계가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단계인 '인증'과 '평가'가 가능한 공공시설과 기반을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이 기반의 핵심은 공용 연구 라인, 지금으로 따진다면, R&D 전용 반도체 팹이었다. 이 공용 라인을 통해 제작된 소자와 웨이퍼, 소재, 부품, 각종 장비 등은 데이터가 공유되며 계측 표준 구축에 활용되었다. 90년대로 넘어가면 일본 정부가 이러한 컨소시엄을 확대한 것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2인치로 기술 전환되는 것을 대비하여 2.5억 달러를 투자하여 SELETE 컨소시엄을 만든 것이나, 차세대 리소그래피 공정에 대비하여 ASET 컨소시엄을 만든 것이나, 설계기술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STARC 컨소시엄을 만든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컨소시엄은 7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VLSI 컨소시엄의 일종의 스핀오프들인데, 각 컨소시엄에는 여전히 일본 경산성과 NEDO 같은 기관의 공적 자금이 수억 달러 규모로 꾸준히 투자되었다. 여기에 회원사들의 분담금도 같이 들어가서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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