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과학자와 패러다임 전환

과학혁명의 구조는 인간 과학자 없이도 가능할까?

by 권석준 Seok Joon Kwon

과학자는 나 자신을 규정하는 여러 정체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질이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 은퇴한 후에도 그럴 것이다. 과학자로서 나는 몇 가지 소망이 있는데, 다들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는 NSC에 논문 내보기 같은 소망도 있겠지만 (사실 이는 이미 실현), 그보다 더 거창한 것은 내 살아생전에 (이왕이면 은퇴 전에), 패러다임 전환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토록 믿어왔던 우주론이 뿌리째 흔들리는 발견이 보고되어 확정된다든지, 양자역학의 해석이 코펜하겐 해석 혹은 평행우주론 따위 다 물리치고 완벽한 해석으로 정리된다든지, 누군가의 엉뚱한 실험으로 상온상압 초전도체가 우연히 출현한다든지, 현재의 센트럴 도그마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생명 정보 전달 메커니즘이 실제로는 더 완벽한 프레임이었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는 AI 자체가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일종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전통적인 의미의 과학적 패러다임 전환에 AI를 포함시킬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제 과학 연구에서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대세가 된 AI의 활용, 심지어는 활용을 넘어, 아예 에이전트화 된 AI 과학자들 (AI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자 에이전트 역할을 하는 AI)이 점점 과학계를 접수(?)하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AI 과학자들에 의해서 (심지어는 인간 과학자 없이도 오로지 AI 과학자들에 의해서) 가능해질 것이냐는 점이다.


이미 최근 AI 과학자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학습-연구 능력은 여러 실험에서 반복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MIT에서 보고한 것처럼, 진자운동 비디오만으로 AI 과학자는 훌륭하게 뉴턴운동법칙을 de novo (백지상태부터)로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발견은 결국 패턴 인식의 산물이므로, 철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흔히 '이해'라고 부르는 산물과 동격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극한의 기억력은 완벽한 이해와 구분할 수 없고, 극한의 패턴 매칭도 완벽한 이해와 구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과학자로서 뉴턴은 사과의 낙하를 보며 중력을 개념화했고, AI 과학자는 진자운동 영상을 보고 수식을 피팅한 것이므로 나란히 비교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용주의 입장에서는 그 둘이 도대체 뭐가 다르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패턴 인식과 매칭, 상관성 해석, 심지어는 최근에는 인과론 해석까지 뻗어나가는 AI 과학자들의 능력은 결국 인간 과학자의 능력을 복제하고 그것을 더 넓고 깊게 추구하면서 동시에 가속하는 것에 있어 현재로서는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서 비슷한 일을 해오던 인간 과학자들은 AI 과학자들에 의해 생각보다 더 빨리 대체될 것이다. 언젠가 미래, AI 과학자들이 과학계를 접수(?)하고, 그때까지 쌓인 거의 모든 분야의 과학 프레임과 패러다임이 허용하는 거의 모든 난제를 다 풀었다고 가정해 보자. 즉, 현존하는 인간 과학 지식의 최종 절벽 끝까지 도달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AI 과학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질문을 찾아 절벽에서 뛰어내릴까? 절벽 다음에 당연히 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절박해서? 절벽 끝은 사실 허상이었다는 깨달음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혹은 죽음은 의미가 없으니 도전은 무제한이라고 간주할까?


고전 중의 고전이 된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과학 연구에서 진짜 혁신이란, 정상과학의 프레임 안에서 허용되는 연속적 변화의 누적보다는, 그 누적된 계단 위에서 갑자기 점프하듯 다음 단계로 불연속적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 같다. 아마 AI 과학자들에게는 연속적 변화의 누적은 쉽게 가속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작업이겠지만, 이 점프라는 것이 자발적으로, 창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멀리 갈 것 없이, 현대 AI의 가장 기저에 있는 딥러닝도 그렇다. 특히 딥러닝의 핵심 아이디어인 신경망은 사실 70년대만 해도 죽은 분야였지만, AI의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튼은 그 아이디어를 미치도록 오래 붙들고 업계의 이단아, 미친놈, 매버릭 취급을 받으면서도 결국 민스키 류의 고정된 인식에서 딥러닝 방향으로의 혁신적 전환을 이뤄냈다. 점프를 하려면 기존 데이터가 지지하지 않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하고, (경력 상으로는)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므로, 웬만한 과학자는 여기에 목숨을 함부로 걸려 하지 않는다. 논문 한 편 나오기 어렵고 그래서 자신의 고용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위험이 없어 보이는 AI 과학자는 충분히 과감한 시도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굳이 왜 AI 과학자가 그런 시도를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한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연속적인 연구의 누적은 대부분 '수렴적 방향'을 따른다. 기존의 모델이나 방정식에 대해, 내가 한 실험이 잘 맞더라, 그래서 그 이론에 입각하여 이렇게 해석할 수 있으니, 이러저러한 효과를 줄 수 있음이 증명된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면 저자도 안정감을 얻고, 심사자도 굳이 혼란에 빠지지 않아도 되고 에디터도 판단함에 있어 부담이 덜하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과학자 커뮤니티에 기여한 것은 작은 increamental knowledge일 뿐이다. 과학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게 된다. 소재과학, 반도체 연구 역시 사실 현대 물리학이 지금까지 정교하게 짜놓은 거대한 프레임과 패러다임을 내가 알기로는 벗어난 적이 아직까지는 없다. 일부 anomaly가 간혹 보고되나, 대부분 실험적 에러이거나 해석이 잘못된 류다. 아마 현재의 과학 연구의 99%는 이러한 수렴적 연구일 것이다. 수렴적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수렴적 연구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침반만 주어진 지도의 공백에 여러 길을 찾으며 산도 그리고 강도 그려 넣고 도시를 잇는 오솔길도 찾는, 그래서 지도를 아주 쓸모 있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 작업은 지도 내를 탐색하는 여러 탐험가들의 노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지도가 조금씩 틀을 갖추어 나가면 그다음 탐험자는 아직 탐험이 덜된 영역을 찾으면 된다. 안 가본 영역을 파악하는 것은 점점 효율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도에서 남은 미지의 영역은 빠르게 줄어들고 마침내 모든 지도에서의 안개는 걷히게 된다. 쨍쩅한 하늘과 확실한 지리라는 소중한 지식은 얻었지만, 지도 밖으로는 나간 적이 없게 되는 셈이다. 지도라는 소중한 자산은 생겼지만, 지도 밖의 세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수렴적 연구는 한계가 아주아주 명확하다. 물론 지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맨땅에 헤딩 식은 아니니, 지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주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동력이 될 수는 없다.


결국 과학 연구에서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수렴이 아닌, '발산/창발적 연구'다. 서로 전혀 결이 다른 영역의 연구가 모종의 계기로 크로스하여 공통점이 우연히 발견되고, 그 공통점이 완전히 새로운 우주의 비밀을 살짝 보여주는 순간 등이 바로 그러한 발산의 연구의 특징일 것이다. 자신의 영역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의 모험적인 한 걸음이 지도 바깥으로 나가는 한 걸음이 되는 셈이다. 다시 AI 과학자 이야기로 돌아오면, AI 과학자는 이러한 발산적 연구를 자발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빠르게 수행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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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하이테크 개발 성과와 기초과학 연구 성과를 해제하는 글을 씁니다. 과학과 사회, 학문의 생태계 지속 가능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이드잡으로 하이테크 스타트업 컨설팅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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