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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Aug 30. 2017

책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정민 저

때는 정조 서거 후. 몰아닥친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유배지 주민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다산은 동구 밖 작은 주막집에 자신을 의탁하죠. 그 한편에서 보낸 유배 초기 4년, 이 시기는 다산뿐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게 됩니다.

다산은 생계도 해결하고 유배의 무료함도 달랠 겸 주막집 한편에 서당을 열었습니다. 그때 시골 아전 자식들이 대부분인 학생들 중 유독 말수가 적고 명민한 소년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만난 지 일주일째, 다산은 그 아이를 불러 세워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대답 대신 주뼛주뼛 자신의 고민을 다산에게 묻습니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

머리도 둔하고, 앞뒤가 꽉 막혔으며, 깨달음도 느려 답답하다며 고개를 떨구는 아이. 이에 다산은 그 유명한 삼근계三勤戒를 들려줍니다. 민첩하게 금세 외우고, 예리하게 글을 잘 짓고, 깨달음이 재빠른 사람은 오히려 그것에 자만해 공부를 게을리하게 된다, 그래서 너 같은 아이가 비록 속도는 늦을지라도 한번 문리를 터득하면 더 큰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고, 또 너라야 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고 부지런, 부지런, 또 부지런해야 한다..

미천한 신분에다 아둔하다고까지 생각했던 자신에게, 서울에서 임금의 총애까지 받던 분의 따뜻한 격려에 소년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열다섯 살 더벅머리 소년 황상, 그리고 마흔둘 다산 정약용,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황상의 학문은 일취월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늘 대견해하던 스승 다산의 가르침을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죠. 오죽하면 항상 만지작거리던 삼근계가 너덜너덜해져서 다산의 아들 정약연이 다시 써줄 정도였으니까요. 다산은 그를 유배생활 중 얻은 자식처럼 여겼고, 황상 역시 스승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삶의 지표로 삼았습니다. 책의 중요 부분을 베껴 쓰는 초서를 강조한 스승의 뜻을 따라 일흔을 넘길 때까지 베껴 쓴 책이 자신의 키를 넘었고, 삼일장을 치르라는 아버지의 유언보다도 인간의 도리를 강조한 스승의 추상같은 호령에 두 달간 시묘살이를 할 정도였습니다. 스승의 한마디는 그의 평생을 좌우했는데, 다산의 일부 제자들이 출세에 눈이 멀어 스승을 저버렸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다산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경기도 마재의 집으로 복귀한 지 또다시 같은 기간의 세월이 흐른 1836년, 결혼 60주년 기념일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스승은 일흔다섯, 황상의 나이 마흔아홉. 열다섯 살 때 삼근계를 받은 이후 34년의 세월이 흘렀던 거죠. 황상은 깊은 산골에 틀어박혀 농사를 지으면서도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늘 스승을 그리워했습니다. 다산도 마찬가지. 힘들던 유배시절, 늘 묵묵하고 성실히 자신의 가르침을 따랐던 제자, 호마저도 성격을 빼어 박은 산석山石 황상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마침 스승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은 황상은 회혼연 잔치에 참석할 겸 드디어 상경을 결심합니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스승을 뵐 수 없을 것 같은 결연한 심정이었습니다. 교통수단이 지금 같지 않던 시절, 전남 강진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결코 함부로 마음 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황상은 말이나 당나귀조차 빌릴 수 없는 처지였고요. 열흘을 넘게 걷고 또 걸어 마침내 황상은 다산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매서운 날씨에 열흘을 넘게 걷고, 길을 묻고 물은 끝에 황상은 해거름에야 겨우 스승 집 대문에 당도했다. 2월 중순께였다. 꾀죄죄한 행색의 나그네가 문가에 섰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잔치 날짜가 여러 날 남아서였던지 집 안은 아직 고즈넉했다. 한참 만에야 하인이 나왔다.


ㅡ 뉘신지요?

ㅡ 강진에서 선생님을 뵈러 왔네만.


전갈이 들어가고, 저만치 정학연이 마루를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ㅡ 알아보시겠는지요? 산석입니다.


정학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ㅡ 이 사람아! 이 사람아! 이게 누군가, 이 사람아! 이 무심한 사람아!


두 사람은 1805년 12월 고성사에서 한겨울을 함께 났었다. 혜장을 따라 같이 대둔사 유람을 다녀온 일도 있었다. 그때는 둘 다 파릇한 젊은이였다. 31년 전의 일이었다. 농사꾼으로 고되게 살아온 그의 삶은 움푹 팬 주름과 구릿빛 피부, 무엇보다 두 손을 맞잡았을 때 손에 박인 굳은살이 웅변하고 있었다.


ㅡ 어찌 이제야 오는가? 아버님이 자넬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아는가?


방 안에 들자 거기 환하게 형해만 남은 모습으로 스승이 계셨다. 스승은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회환이 밀려들어 왈칵 눈물이 났다. 황상은 오는 내내 이 순간 무슨 말씀을 먼저 올려야 할지 생각했다. 막상 스승 앞에 서자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서서 큰절을 올렸다.


ㅡ 제자 인사 올립니다.


황상은 스승 앞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먹였다. 그렇게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스승은 제자의 들먹이는 어깨를 말없이 보았다. 이빨이 다 빠져 합죽해진 입으로 스승이 말했다.


ㅡ 그만 일어나거라.
ㅡ 진작에 뵈었어야 하는데, 이 길이 이리 멀었습니다.
ㅡ 네가 이제야 왔구나. 나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보여주러 왔구나. 잘 왔다. 많이 생각했더니라.
ㅡ 송구하옵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책 p.399-402.)
 
마재에 머무는 동안 황상은 스승을 위해 약탕관 역할까지 자청하며 수일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날 새벽, 그는 스승께 작별의 큰절을 드렸습니다. 다산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제자의 투박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답지 않게 삐뚤빼뚤 쓴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부채 한 자루, 책 한 권, 중국제 먹과 붓 하나, 담뱃대 하나, 그리고 엽전 두 꿰미. 책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라는 의미였고 부채와 담배는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공부에 열중하라는 의미였죠. 끝까지 학문을 놓지 말라는 스승의 간절한 당부였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먼 길 내려가다가 배를 곯을까, 심신이 쇠약한 상태에서도 스승은 여비까지도 챙겨주었습니다. 황상은 대답도 못한 채 복받쳐 오는 울음을 삼켰습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물러 나와 고향을 향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황상은 다산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꺼이꺼이 울며 다시 마재로 걸음을 되돌렸습니다. 그리고 자식처럼 모든 장례 절차를 끝까지 지켰죠. 상을 마치고도 그는 상복을 입은 채로 낙향했습니다. 18년 만의 스승과의 재회가 영원한 이별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 후 황상이 다시 마재를 찾은 것은 10년 후.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쉰여덟의 나이에 18일을 꼬박 걸어 올라왔습니다. 황상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 날씨에 웬 부채냐며 반갑게 맞이하는 정약연이 묻자 황상은 답합니다. " 지난번 내려갈 때 선생님께서 주신 부채입니다. 선생님 생각날 때마다 이걸 매만지며 살았습니다." 황상과 다산의 두 아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상은 스승의 묘소로 올라가 10년 만에 마주 섰습니다. 그는 땅거미가 질 때까지, 길고 짙은 회한과 그리움의 통곡을 했습니다.

이때 황상이 가져온 부채에 정약연은 시를 짓고 학연의 아우 학유와 그 아들이 이를 받아 한 수씩 다시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황상이 화답하며 그들은 오랜 회포를 풀었습니다. 그날 정학연은 황상에게 제안 하나를 합니다. 자신들의 세대뿐만 아니라 자식 세대까지 두 집안의 인연을 이어가자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황계丁黃契'입니다. 서로의 이름은 물론, 자식들의 이름과 생시들을 적고 대대손손 그들의 인연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죠. 동서고금을 통해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운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황상은 전남 강진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일속산방一粟山房에서 거처하며 매년 기일 마재를 향해 곡을 했습니다. 너무도 스승이 그리운 날엔 홀로 다산초당을 찾았습니다. 그런 황상의 애절함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서일까, 제가 찾던 날 초당 바닥에 뒹굴던 풀 한 포기 나무 한 잎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직접 써서 끌로 새긴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만 변함없고, 뜰과 채마밭엔 잡초가 무성했다. 담장은 허물어지고 샘 둘레의 벽돌도 무너져 내려앉았다. 영수는 요 임금 때 은자인 허유와 소보가 숨어 살던 곳이다. 황주는 소동파가 좌천을 당해 7년간 다스렸던 고장이다. 그가 떠나게 되자 그곳의 부로父老들이 모여 성대한 전별연을 베풀어 그간의 은혜에 감사한 일이 있었다. 스승이 떠나실 때도 그랬었지. 초당의 대숲 언덕과 연지만 여태 그대로 남아, 그날의 자취를 희미하게 떠올려준다. 백 년도 못 되어 다산초당이 이토록 황폐해진 것이 못내 안타깝다. 하지만 어찌하리. 그는 공연히 뜰의 잡초 몇 뿌리를 뽑다가,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 몇 개를 발로 툭툭 차며 초당을 내려왔다. 스승께 부끄럽고 면구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책 p. 458-460)


황상은 이후 세 번을 더 상경합니다. 한번 마음먹으면 이리도 쉽게 올라올 것을 왜 스승님이 살아계실 때 자주 올라와보지 못했나 그는 후회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상경한 것은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사망했을 때, 황상의 나이 69세였습니다. 그동안 황상의 시는 다산의 두 아들들을 통해 서울의 문인들에게 소개되어 그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재상을 지낸 권돈인을 비롯, 당대 명망 있는 문인들이 그를 직접 만나 교류하고 싶어 했고, 특히 추사는 제주에서 유배가 해배될 때 집으로 올라갈 마음이 급할 텐데도 강진으로 걸음을 옮겨 황상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느냐며 말끝을 흐리던 열다섯 살의 시골 아전 아들 황상. 그의 학문이 나이 쉰을 넘어 비로소 인정받게 된 것이죠. 이 모든 것이 스승의 가르침을 우직하게 실천한 그의 성실함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충실한 사료를 토대로 써진 책입니다. 다산과 황상을 수년간 연구했던 저자이기에 글에 더욱 신뢰가 갑니다. 게다가 꾸밀 줄 모르는 저자의 담담한 필치는 감동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자기 전, 침대맡 스탠드에 의지해 읽는 시간들이 행복했습니다. 남아있는 페이지수가 줄어들 때는 아쉬움마저 생겨났습니다. 가끔씩 와이프와 아들에게 감동적인 시구절을 읽어줄 때면 저도 모르게 메어 들어가는 목을 몰래 추슬러도 했고요.

소셜미디어 '친구' 숫자가 인간관계의 척도인양 행세하는 시대, 무수한 인스턴트식 만남들에 피로감이 가중되는 이때, 다산과 황상 두 사람의 인연은 우리에게 말없는 가르침을 줍니다. 진정한 사람의 관계는 결코 숫자나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말이죠. 짙은 묵향 같은 그들의 만남이 그리워지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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