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함으로 남다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하교하기로 했다. 한겨울에도 우리는 근 십 리도 넘는 길을 걸어서 통학했는데 갑자기 날씨가 쌀쌀하니 걸어가겠다는 친구가 없었다. 십일월의 어느 날. 중학교 독서실에서 자습하며 버스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독서실은 시멘트 바닥 그대로였고 패여서 울퉁불퉁한 곳도 있었다. 어두컴컴한 독서실에서 몇몇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1년 후배 남학생들 몇 명이 들어오더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쌀쌀맞게 톡 쏜 후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남학생 중 한 명이 갑자기 내 책가방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며 난 쫓아갔고 결국 독서실 안인지라 맴맴 도는 정도에서 가방을 되찾았다. 책가방을 들고 가봐야 돈이 든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창피하게도 내 가방과 그 속에 책들은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온 김칫국물로 물들어 얼룩덜룩했다. 게다가 시큼한 김치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마치 내 속을, 아직 다 여물지도 않은 알몸을 보여주는 것처럼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B라는 남학생은 나중에 그의 친구에게 들은 얘기로는 B가 전교 1등을 하고, 게다가 반장이라고 했다. 당시 성숙이 좀 빠른 친구들은 나름 이성 교제를 하고 있었다. 이성 교제라고 해야 편지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지만 난 별 관심이 없었다. 한마을에 또래 남자친구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남녀 차이를 못 느꼈고 이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장난을 치고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그 애에게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졌다. 이성이라기보다는 뭔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그의 마을은 우리 집보다는 가까워 걸어서 통학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버스를 탔다. 잠시지만 짧은 마주침에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면 공부를 좀 한다하는 학생들이 선생님 심부름으로 대신 채점을 하고는 했다. B는 내 이름을 벌써 알고 있었고, 내 성적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중상위권의 성적이 썩 내세울 만한 건 아니었는데 그는 내게 공부를 잘한다며 치켜세워줬다. 대부분 학생이 한 학년 위는 말도 붙이지 못할 만큼 선배를 어려워했는데 그는 당당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선배한테 건방지게 까불지 말라며 제법 선배다운 엄포도 놓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나보다 한 살 위였다. 그건 그와 같은 학년인 우리 동네 후배가 귀띔을 해줬다. 그는 아홉 살, 난 일곱 살에 입학했기에 결과적으로는 내가 한 살 어린 선배인 셈이었다. 어쨌든 선배는 선배였다. 그 후로도 이따금 마주칠 일이 있었고 우린 예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제법 얘기도 잘 주고받았다. 그는 육군사관생도가 꿈이라고 했다. 게다가 학년 회장에 학급 반장까지 맡았기에 여학생들에 대한 인기 또한 높았다. 그런데 그는 유독 내게만 관심을 보였다. 동급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싫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에 제법 귀염성 있게 생겼으니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모든 인기를 뒤로 하고 그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고 나는 무언의 수락으로 우린 친구가 되었다. 사랑이 무언지도 모를 나이 왠지 모를 설렘이 내게 찾아왔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두근거리고 호기심이 넘쳤던 건 사실이다. 둘의 징검다리 역할을 그의 친구가 했는데 그에 대해서 상세히 얘기해주며 그가 내게 향한 마음을 전달해 주었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내 관심도 깊어졌다.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그의 친구를 통해 카드를 주고받았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크리스마스 축하 카드를 준비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학교에서 그의 얼굴을 볼 일은 없었다. 가끔 그가 내게 장난 걸던 첫 만남이 떠올랐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고민 끝에 난 맹랑하게도 ‘나의 첫 남자친구 OO에게’로 시작해 편지를 썼다. 대부분이 그렇듯 안부를 묻고 그 애가 원하는 육군사관생도가 꼭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곧 그에게서 답장이 왔고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자세히 관찰했는지는 편지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떨고 있는 네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라는 글로 추위에 떨었을 나를 염려해줬다. 변변한 외투 하나 없던 나는 한 겨울에도 얇은 가을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먼 친척의 친척이 보내온 옷이었다. 남이 입던 옷이라서 싫다는 기분을 가질 새도 없이 맞는 옷이라도 있으면 횡재한 기분이 들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옷매무새가 형편없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의 진심 어린 말이 잔잔한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가난하기는 그와 나 오십 보, 백 보였다. 어느 날 학교 현관에서 마주친 그의 양말 신은 뒤꿈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는 부끄러운지 발을 오므렸다.
한마을에 사는 친구는 내 얇은 옷매무새에 대해 걱정이 담긴 얘기를 수시로 해댔다. 겨울 외투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야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었다. 강추위에 계속 노출되다 보니 감기가 낫지도 않은 데다 계속 춥다는 내 성화에 못 이겨 엄마가 나를 읍내 시장에 데려갔다. 우리 집 형편에는 거금을 들여 폭신한 겨울 점퍼를 샀다. 추위보다 무서운 건 나를 불쌍한 듯, 멸시하듯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빛이었다.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무엇보다 안심이었다. 새로 산 외투는 겨울인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포근했다.
방학이 끝나 개학하고 학교에 갔지만 그를 마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만 그립고 궁금함이 일었을 뿐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내 영혼을 더 크게 지배했다. 한데 그의 학년에는 벌써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것도 그가 동급생들에게 나와 사귄다는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 올랐다.
따로 만난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자체가 어처구니없었고 순간 배신감이 느껴졌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모든 학생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이 아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는 여전히 내게 미소를 보냈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편지 몇 번으로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이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한마을 남자 동창들은 알고 그러는지 은근히 나를 비꼬기도 했다. 후배가 좋으냐고 비아냥거렸다.
중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한마을 친구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의 동선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시장 골목 어귀에서 그와 그의 친구들 여럿이 진을 치듯 내게 다가왔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수줍어 고개를 푹 숙였다. 나와 마주한 그는 조화로 만든 노란 장미 한 송이와 분홍 장미가 곱게 물든 손수건을 내게 내밀었다. 그도 쑥스러운 듯 “졸업 축하해!” 한마디만 뱉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나 역시 “고마워” 대답만 하고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머릿속은 하얘지고 같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자는 말은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참 어색하고 짧은 만남이었다. 장난치고 할 때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 점점 부끄러웠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그를 더 이상 학교에서 볼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마을 남자 동창에게서 후배를 좋아하느냐는 비아냥을 들은 이후 갑자기 내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버스를 갈아타고 하교하다 보면 그가 보이곤 했다. 여간해서는 버스를 타지 않는 그가 왜 탔는지 내심 궁금하면서도 외면했다.
나를 계속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늘 붙어 다니던 한 마을 친구까지 그가 날 쳐다본다고 말을 했을 때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딱히 그의 어디가 싫기보다는 후배가 좋으냐는 친구의 그 말 때문이었다. 봄이 되자 그가 대구로 전학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편 아쉽기도 하고 한편 홀가분했다.
어느 토요일 하교하기 위해 면 소재지 버스정류장에서 친구들과 있다가 그와 마주쳤다. 그는 애써 나를 외면하는 듯했고 그의 친구들과 정류장 밖으로 나갔다. 카메라까지 둘러맨 걸 보니 사진관에서 대여한 모양이었다. 그가 전학을 앞두고 친구들과 추억을 남기려나 보다 짐작했다. 한마을에 사는 그의 동급생이 내게 다가왔다.
“OO이가 전학 가기 전 너랑 놀러 가고 싶다는데 따라갈래?”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를 잊기로 했으니 그렇게 전하라고 말했다. 그 후로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제 고1이 남자친구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 같았다. 그건 일종의 죄악처럼 인식되었다. 결국 그는 나와 말 한마디 못 하고 대구로 떠났고, 학교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혼자 자취한다는 그. 아는 이 없는 대구에서의 생활이 아직 낯설다고 했다. 카세트테이프에서는 이선희의 ‘J에게’가 들려오고 있으며 내가 자꾸 피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진지하고 솔직담백하게 쓴 그 편지도 내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당시 학교의 분위기가 이성 교제는 문제 학생으로 여기는 때라 편지를 누가 볼까 봐 다 읽지도 못하고 얼른 찢어버렸다. 이후 몇 번 편지가 더 왔지만 난 읽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모범생으로 인정받는 내가 누가 알까 봐 겁나고 거기에 대한 비난이 또 두려웠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한마을 후배로부터 그의 소식을 들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떨어지고 국립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장학생이 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삼촌이 운영하는 제빵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사관생도가 되길 기대했던 내 실망은 무척 컸다. 그나 나나 가난이 우리의 발목을 잡은 건지,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의 당찬 포부와는 달리 밝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덩달아 나까지 우울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그가 생각났다.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는 그의 눈빛과 함께였다.
그에 대한 소식은 간간이 한 마을 사는 그의 동창이 내게 들려줬다. 나는 그에 대해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고, 어떤 이야기를 해줘도 못 들은 척 넘겼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가 아직도 내게 미련이 남은 건지, 그래서 자꾸 내게 들려주는 건지, 아니면 내 속내가 읽혀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때의 나이보다 3배는 더 된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처럼 생생하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애틋하고 더 그리운 것. 영원히 십 대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리움이라는 마음 상자를 보관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