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쌓인 시간
바닷바람은 염천 더위도 잠재우는 것일까. 스스로 눈을 감으면 아스라하게 들려오던 그날의 환희와 함성. 지금도 귓전에서 쟁쟁하게 들리는 것만 같은 즐거운 음성. 바다는 물만 파란 게 아니라 소리도 하늘도 파랗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파란빛 덕분에 찜통 같은 더위는 온데간데없이 청량함만 가져다준 광안리 바다. 어쩌면 아직 사그라지지 않는 우리 젊은 기운이 합쳐져 더욱 파란빛을 내뿜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포항으로 부산으로 혹은 구미로 우린 강력한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 만났다. 섬 타는 연인이라도 만나는 것처럼 풍선이 한껏 부풀어 터지기 직전의 상황처럼 설렘 또한 컸다. 성향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입맛 또한 개성이 다르니 어떻게 보면 심하게 부조화인 것 같으면서도 우린 일 년에 한 번은 꼭 만났다. 적어도 코로나가 있기 전까지는. 그러던 것이 코로나 때문에 미루고 미뤄 다시 뭉친 게 꼭 4년 만이다.
4년이라는 시간은 참 많은 걸 바꿔놓았다. 우리의 나이가 쉰 중반으로 떠밀리듯 변한 것과 사람끼리의 만남마저 대면보다 비대면이 일상화되다 보니 거기에서 파생되는 귀찮음이 한몫 더해 습관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렇듯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바꿔놓았다. 핑계 대기가 오죽 좋은가. 어떤 구실을 대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유행병이 한편으로는 사람들 간의 거리를 더 벌려놓았을지도 모른다.
기차역까지 한 시간을 달리고 ktx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해 친구들과 만나 광안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수은주가 한껏 폭증하는 8월 초,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뻐할 새도 없이 만원인 버스에서 사람에 치이고 게다가 에어컨은 켰는지 껐는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차 안에는 더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거리는 좀 먼가. 한 시간을 넘게 달려 광안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우리 속에 갇혔다 탈출하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벌써 기운이 빠져 더 이상 걷기 힘들다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중 저 멀리 바다가 우릴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우린 드디어 광안리에 왔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고생 끝 즐기는 시간만 남은 것이다.
부산에 사는 친구가 요트투어를 예약했다기에 남은 시간까지 카페에서 수다 떨기로 했다. 몇 좌석 되지 않은 자그마한 카페를 점령한 우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깔깔깔, 호호호 웃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동안 못 만났던 회포를 끊임없는 이야기로 풀어갔다.
처음에 약간 서먹했던 분위기는 수다가 이어지면서 물에 설탕처럼 녹아들었다. 예전에 만나서 놀았던 이야기부터 친구들 소식까지 수다는 잠시도 끊기지 않았다. 중년의 아줌마가 다 된 우리는 마음만은 중·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을 만난다는 건 현재가 아닌 소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서 기쁘고 설레는 것이다.
요트 탈 시간이 가까워 우리는 못다 한 수다에 아쉬움을 보따리째 남겨두고 서둘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관광객이 탑승할 준비를 하느라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안내요원이 건네주는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차례가 되어 요트에 탑승했다. 신나는 음악이 쿵쾅쿵쾅 울려 퍼지며 요트는 광안대교를 향해 출발했다. 그 무덥던 기온도 바다 가운데 있으니 어느새 싹 사라진 듯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고 분위기에 취해 마음도 달 만큼 두둥실 떠올랐다. 광안대교의 불빛은 더욱 현란해지고 바다 위에는 요트 위의 탑승객들이 저마다의 흥에 취해 광안리 일대가 들썩이는 것만 같았다.
바다에서 보는 야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인공미를 자랑하는 초고층 아파트는 밤이 되니 더욱 그 빛이 발했다. 마천루 같은 건물이 마주하는 광안대교는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불빛이 뿜어내는 환희와 전율은 오십 대인 우리들의 나이를 십 대로 데려갔다. 찜통 같은 더위에 장시간 시내버스에 시달릴 때만 해도 괜히 왔나 하는 후회가 슬그머니 밀려왔었다. 쉰을 넘긴 후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여행이 들뜨기보다 부담스러움이 먼저였는데 박하 향같이 신선한 바닷바람을 한껏 맞으니 가슴속까지 시원했다.
여행의 묘미는 관람도 맛있는 음식도 좋은데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사진이다. 흔들리는 요트에서 자리를 옮기며 우린 온갖 표정과 자세를 잡으며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졌다. 사진을 찍으며 확인하고 또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사진에 예쁘게 나오기 위해 미소를 살짝 짓고 손가락 하트를 그리다 보니 일상에서의 잡다한 번뇌를 잊고 온통 웃음과 행복만이 우리 주위를 감쌌다. 광안대교 근처로 다가가자 조명은 색상을 달리하며 맑고 밝게 다가왔다.
우린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이다. 결혼 초에는 다들 살림하고 자식 키우기 바빠 연락이 뜸하다가 십 년 전쯤부터 연중행사로 만나게 되었다. 특히나 잘 웃고 활달한 성격의 친구가 두 명이나 있는지라 만나기만 하면 고민이나 근심 하나 없는 사람처럼 웃음이 터졌고 그 모습을 보는 흥이 부족한 두 여인도 덩달아 웃음보가 터졌다. 그랬기에 함께 하는 시간은 늘 유쾌함으로 가득 찼다. 역시나 이번에도 두 친구가 흥겨움을 견인했다. 만남은 해마다 계속되었지만 만날 때마다 또 다른 즐거움에 여름만 되면 이 친구들 만나는 게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한 시간 동안 축제 분위기 요트 타기는 끝이 나고 우린 흥겨움의 여운을 살짝 남겨둔 채 하선했다.
벌써 밤은 깊어 캄캄하고 배가 출출해진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늦어 벌써 불이 꺼지는 점포가 반 넘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고 겨우 찾았다 싶으면 문이 닫혔든지 닫으려고 하는 통에 허탕만 치고 헤매다 포기하고 숙소에 가서 피자와 치킨으로 빈속을 채워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 밥이 없는 저녁이 허전했지만 배달해 온 음식으로 속을 채우며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은 벌써 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다음날을 위해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국밥으로 얼큰하고 시원한 식사를 하고 다음 행선지로 택시를 탔다.
옛 고려제강의 첫 공장을 카페로 재탄생한 카페는 바로 옆에 대형마트가 자리하고 기념관까지 있어 볼거리도 제공했다. 카페에 가기 전 대나무숲으로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며 또다시 수다에 빠졌다. 마음이 즐거우니 산책로 주변에 핀 꽃과 식물도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길지 않은 산책길이 어찌 그리 호젓하고 정감 가는지 시간이 많다면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갤러리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엄청난 부지에 희귀한 화초와 물을 가두어 놓은 정원을 거닐었다. 친구들과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구석구석 정성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으니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이제 드디어 카페에 들를 차례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약간은 이질적인 금속의 와이어가 시선을 끈다. 커피 마시기보다 카페 둘러보는 것이 박물관을 보듯 신기하기만 했다. 와이어 공장이 조금 전까지 가동한 듯 널찍한 철 탁자와 철 기둥, 와이어가 하나의 작품처럼 다가왔다. 카페 안은 수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다가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 당구대보다 넓은 철판으로 된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으며 또 수다를 이어갔다. 무언가가 닫힌다는 건 그 지점에서 퇴보하거나 소멸을 상징한다. 자칫 지역의 폐허가 되어 시간 속에서 영원히 잠 속에 빠질 공장이 부활한 모습을 보니 금속들에도 숨결이 깃든 듯 생동감마저 느끼게 했다.
무더운 날씨만큼 바깥은 금방 소나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카페 안에서 우린 느긋하게 앉아 담소하며 살짝 졸기도 하다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만남은 금방인데 헤어짐은 누군가 등을 잡아당기는 듯 자꾸만 돌아보게 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지겨운 일상이 반복되겠지만 친구들과 시원한 바다가 부르니 다시 일 년 후를 기약해 본다. 후덥지근하고 나른한 여름이 오면 날 부르는 그 바다가 저만치서 손짓한다.
2022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