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을 파는 사람
좀체 티브이를 시청하지 않다가 추석 전날 저녁에 티브이를 켜니 마침 모 가수의 공연이 방영된다. 다른 데서 공연한 것을 방송에서 녹화로 보내주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추석 특집으로 한다는 자막이 뜬다. 노래 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언론에 간간이 비추던 사생활과 강한 이미지 때문에 크게 호감을 느끼지 못한 가수. 그렇지만 그의 무대 매너와 노래 실력은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청중을 휘어잡는 묘한 매력이 잘 눌어 우린 누룽지 맛이다.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가수’라는 수식어를 열혈 팬이 붙여줬다.
연휴인데도 해야 할 과제물 때문에 마냥 쉬지도 못하고 읽히지도 않는 책만 들었다 놨다 하다가 나도 모르게 티브이 속으로 빠져든다. 그가 공연을 하면 10분도 안 돼 표가 매진된다는데 무료로 멋진 공연을 볼 수 있다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의 음성, 몸짓, 눈빛, 의상, 머리털 한 올까지도 훑어본다. 어찌 보면 일흔이 넘은 노구인데도 노쇠한 기운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이럴 때 딱 들어맞는다.
트로트는 왠지 나이 들어 보이고 구식 같고 뭔가 값싸 보인다는 지나친 편견을 갖고 있던 내가 몇 해 전부터 트로트를 듣게 됐다. 어쩌면 인간사를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트로트가 아닌가 한다. 애잔한 발라드 분위기에 젖어 나도 모르게 곡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고독에 빠지기도 하고 없는 시련의 아픔이라도 겪은 양 눈물짓기도 한 적이 있다.
발라드가 인간의 감성을 톡톡 건드린다면 트로트는 솔직히 툭 터놓고 말 그대로 감춤보다는 적나라함이다. 리듬도 민요풍의 3음보가 많다. 한마디로 흥이 나는 장르이다. 슬프든, 아프든, 괴롭든, 즐겁든 나름대로 흥이 있는 멜로디다. 어쩌면 코로나19라는 변종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침체해 있는 이때 국민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또한 트로트 장르가 아닌가 한다.
그간의 공백기에 은둔설, 잠적설이 나돌았던 그가 11년 만에 나타나서 하는 첫마디에 솔직함이 드러난다.
“저 보고 신비주의라고 하는 데예. 그건 언론에서 만들어놓은 이야기입니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충전하기 위해 여행을 다닙니다. 그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고 책을 읽으며 곡을 만들기 위한 충전을 했십니더.”
정제되지 않아 거칠어 보이는 언어지만 가식이 느껴지지 않고 진정성이 우러나온다.
공연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메머드급이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배 한 척이 파도에 휩쓸려 표류한다. 당장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것 같은 시커먼 파도는 인정사정이 없다. 그러다 바다는 잠잠해지고 커다란 함선이 무대 중앙에 나타나 2020년의 닻을 올린다. 성난 파도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상황 같고 배 한가운데 우뚝 선 사람은 마치 구세주처럼 우리를 구해줄 것만 같다.
가수는 묵직한 울림을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와 성대를 통해 파열하며 토해낸다. 늠름한 호랑이가 포효하듯 힘찬 기운이 마구 꿈틀거린다. 가사에 주인공인 양 갖가지 사연을 담아서 때로는 비트를 강하게, 때로는 한없이 살갑고 여리게 감정을 적절히 실어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막걸리를 동이 째 들이킨 듯 한마디로 컬컬하고 시원하다. 코로나로 막혔던 가슴속이 뻥 뚫리듯 시원함을 넘어 통쾌함이 밀려온다. 노래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눈빛, 목청과 감성이 비빔밥처럼 잘 어우러져 일품요리가 완성된다. 이보다 맛깔스럽고 감칠맛 나는 무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추석 명절이라는 분위기와 걸맞게 1부는 ‘고향’을 주제로 구성지고 감칠맛 나는 노래가 펼쳐진다. 특히나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치고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첫울음을 터트리고 땅 디디고 섰던 곳이니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고 싶은 것이 고향 아니겠는가. 그 땅의 흙냄새와 바람 냄새를 온몸으로 받으며 성장했으니 대처에서의 부침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도 고향이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알을 낳기 위해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듯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탯자리가 그립다.
2부에서는 ‘사랑’ 주제로 곡에 따라 애잔하기도 하고 흥겹기도 한 노래가 물결친다. 어쩌면 목소리의 마법사라도 된 걸까.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그러면서도 또 허스키한 음색이 정말이지 팔색조가 따로 없는 것 같다. 자칫하면 축축 늘어질 법도 한 트로트라는 장르를 지나치게 늘어지지도 않고, 꺾는 것도 너무 간드러지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시원한 폭포수가 쫙쫙 쏟아져 내리듯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시선이 잠시라도 화면에서 떠나지 못한다. 팬이 아니었던 나도 이런데 정말 좋아하는 팬이라면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지 않을까. 80세가 넘은 원로 아나운서와의 인터뷰에서 국가에서 주는 훈장을 상신하지 말라고 한 이유에 대해
“세월의 무게도 무겁고 가수로서의 세월도 무거운데 훈장까지 목에 걸면 무거워서 우째 살아갑니꺼? 가수는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됩니다. 가끔은 친한 사람들과 실없는 이야기도 하고 술주정도 좀 하고 그래야 사람 사는 맛이지요.”
그에 대한 수식어는 화려하기만 하다. ‘가황’은 가수로서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가수 중에 황제이니 황제보다 더 높은 것은 인간 세상에서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값비싼 양주보다 막걸리처럼 심심하며 부담 없고 친근하다. 무엇보다 가식 없는 솔직함이 최고의 매력이다. 세련되지 않고 다소 투박해 보이는 말투이지만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진심이 느껴지기에 많은 이들이 환호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3부에서는 ‘인생’을 주제로 무대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이름도 이색적인 ‘테스 형’이라는 노래가 전개될 때는 순간 영국 소설 「테스」인가 했다. 일렉기타리스트의 멋진 선율이 먼저 강한 비트로 분위기를 잡으며 노래가 시작된다. 록 장르에나 어울릴 듯한 일렉과 트로트의 만남. 노래 한 곡은 마치 뮤지컬 한 편을 보는 듯하고 백댄서의 동작은 군무를 추듯 절도가 있다.
그토록 애닯게 부르는 ‘테스 형’이 소크라테스인 걸 안 순간 웃음이 팡 터졌으나,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 인생에 대한 고민을 소크라테스에게 하소연하는 형식이다. 만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의문을 역시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를 던지고 먼저 간 철학자에게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토로한다. 소크라테스라고 어디 특별한 사람이던가. 후세들에게 ‘철학’이라는 거대 담론을 남기고 갔지만 그 역시 하나의 자연인일 뿐이다.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 그가 이토록 솔직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랫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발상이 기발하기만 하다. 50년 넘게 오직 가수라는 외길 인생을 걸었기에 그 경험이 쌓이고 녹아 그에게 내면화가 된 것 같다.
그러면서 현재의 위기에 대해 뼈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제가 살면서 역사책을 펼쳐봐도 왕과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에 굴하지 않고 자기 몸을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유관순 열사, 논개,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 일반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을 구하는 건 우리 국민 여러분입니다. 국민들이 힘을 뭉치면 위정자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말이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린다. 그저 자기 밥그릇 싸움에만 연연하는 정치인들에 비해 얼마나 계산적이지 않고 당당한 발언인가.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함에 그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우리나라 최고 부호의 공연 초청도 거부했다고 하니 가수로서 자존심 또한 상당하다 하겠다. 자기 노래가 좋으면 표를 사서 관람하면 된다고 할 정도이니 진정한 아티스트라 칭송하고 싶다. 작사, 작곡한 곡만 몇백 곡이고 히트한 곡만 120곡이 넘을 정도이니 싱어송라이터로도 최고가 아닐까. 과히 대중가요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어게인’이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몸값 비싸기로 유명한 그가 출연료도 받지 않고 마련한 공연에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대통령급이라고 네티즌들이 입을 모은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훈아가 진짜 애국자다’는 댓글도 쏟아진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명절 때도 친척 간의 방문을 자제하고, 그야말로 갈 곳이 없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현실에서 그의 공연은 전 국민에게 무엇보다 큰 추석 선물을 안겨 줬다. 그 순간만큼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노래에 흥얼거리고, 그것을 매개체로 우리의 정서에 파고드는 종합예술을 선물세트로 받았다. 또 하나 그가 파는 꿈을 우리는 샀다. 희망이라는 밝은 꿈을.
2020년 구미문예공모전 입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