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마
장마가 한 달 넘게 이어진다. 여느 해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마른장마가 계속되기도 했는데 올해는 심상치 않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걸까, 신이 노한 걸까.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이상 기후가 발생하는 건 아마도 인간이 자초한 일. 그간 아무 대가 없이 온전히 자신의 몸뚱어리를 내어준 지구를 인간이 인정사정없이 유린했다. 탐욕은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제 속내를 감추고 지구의 곳곳을 파헤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그 또한 인간의 어리석은 단면은 아닐는지.
폭우가 쏟아지니 둑이 터지고, 제방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고, 지반이 붕괴되고, 생활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으니 자연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임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온 나라, 전 세계가 쏟아지는 물 폭탄에 갈피를 못 잡는다.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수재민들 심정을 오롯이 짐작이야 하겠냐만 그 황망하고 애타는 마음은 눈앞이 아뜩하여 망연자실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젯밤 방송에서도 집중호우를 알리는 보도만 계속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비까지 내리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일단 갈 곳이 없으니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한다.
나 역시 갑자기 닥친 실직에 장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무료하기가 짝이 없다. 글쓰기도 지루한 장마처럼 진전이 없고 책 읽기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 유튜브로 얼마 전 전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를 듣다가 그것도 지겨워져 3~40년 전의 영화와 드라마를 무료로 보게 되었다. 근·현대소설을 드라마화한 작품인데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게 중년이라면 누구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10권으로 구성된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몇 년째 완독 못 하고 있다. 8권째에서 좀체 진도가 안 나간다. 영화로 보니 시간에 부담 없이 2시간 이내에 끝난다. 전체 흐름을 읽기로는 영화가 빠르지만 아무래도 인물 유형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는 책만 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마지막 빨치산 이야기인 「남부군」도 봤다. 『태백산맥』이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넓다면 『남부군』은 지리산 일대를 배경으로 1년 6개월 동안 빨치산들의 처절한 저항을 다룬 작품이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종국에는 전쟁보다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인민해방의 결의마저 의미를 잃게 만든 극한의 환경은 그들이 추구한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허무함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눈여겨본 작품이 윤흥길 원작의 <장마>이다. 제목처럼 공간적 배경은 장마가 계속되는 어느 농가이다. 시간적 배경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사돈집 곁방살이하는 한국군 장교의 어머니와 사상성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붉은 완장을 찬 채 인민군에 가담한 아들을 둔 주인집 어머니의 첨예하고도 피 터지는 갈등이다.
국군 장교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국군이 밀리고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초조함과 불안이 극에 달한다. 급기야 화살은 인민군 자식을 둔 사돈에게로 향하고 전사 소식을 듣고는 까무러친다. 이 모든 게 인민군 때문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악담과 저주라는 날카롭고 치명적인 날을 세워 상대를 사정없이 후벼 파다 못해 난도질한다.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도 일차원적인 유치함을 밑바닥까지 보여주며 원초적인 본능까지 끌어올린 어머니의 서슬 퍼런 잔인함은 아들의 죽음을 예감했기에 필사적이었는지 모른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받게 되는 아들의 전사 소식에 곁방살이한 노파는 쏟아지는 비를 종일 맞고는 저주스러운 악담을 허공을 향해 퍼붓는다.
인민군이 쫓겨 가고 국군이 점령한 가운데 주인집 아들은 소식이 없다. 용한 점쟁이가 돌아온다던 날 온갖 음식을 차려놓고 아들을 기다리지만, 아들은 오지 않고 대신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집으로 찾아든다. 먼저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을 당해본 노파는 사돈총각임을 알아차리고 쓰러진 친모를 대신해 위령제를 지내주고 구렁이는 자기 길을 찾아 떠나고 두 노파는 화해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더구나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이고 죽는 전쟁은 그대로 비극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꼭두각시처럼 놀아난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지울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상처는 사람들을 지옥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내몬다. 그 상흔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장마가 계속된 것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의미한다. 모든 사건 또한 장마기인 걸로 봐서 장마의 상징은 곧 끝나지 않은 전쟁, 이념의 갈등이다.
유배와 다름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빨래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젠 마음마저 우울해지려고 한다. 비는 회색이다. 회색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이 허섭스레기처럼 널브러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감은 눈 위로 희미하게 빛이 스민다. 눈을 뜨고 발코니로 나가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발그무레하게 비치는 것이 아닌가. 얼마만의 해인가. 땅은 아직 젖었건만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아파트 바로 앞의 산에서도 새소리가 깍깍깍하고 들려온다. 잽싸게 산보를 나갈까 하다가 며칠 하지 못한 빨래가 생각났다. 수건에 표백제를 부어 가스에 올렸다.
얼마 안 있어 빨래가 끓어오른다. 구수한 세제 냄새가 온 집안에 맴돈다. 가스 불을 줄이고 수건을 한 번 뒤집어 주고 이제 뭉근히 고아줄 때다. 텍스트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파고들어 섬유조직 구석구석의 찌든 때를 벗겨내야 한다. 그러자면 섬유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삶아야 한다. 오욕의 때가 찌들대로 찌든 인간의 몸을 닦고 닦았으니 그 더러움을 지우자면 솥 안에서 세제와 증기가 뒤엉켜 찌든 국물을 추출해야 한다. 솥 안은 백설기처럼 뽀얀 거품이 뭉글뭉글 너울을 넘는다. 그 너울은 솥이 비좁다는 듯 요동을 친다.
30분 이상 폭폭 삶은 빨래를 세탁기에 다시 돌리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간다. 언제 또 비가 올지 모르기에 볕이 있을 때 걷기 위함이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오자 옆 산에서 먼저 매미들이 비가 그친 것을 아는 모양이다. 일제히 쌔름쌔름-맴맴 합창한다. 늘 걷던 산책길이건만 날이 화창하니 기분까지 덩달아 밝아진다. 들에는 벌써 참깨를 찌고 있다. 그간 내린 비로 참깨가 제대로 여물기나 했을까만 애써 지은 곡식이니 소출이 많든 적든 거둬야 할 것이다. 특히나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장마이니 잠깐이라도 비가 그칠 때 거두지 않으면 비에 잠긴 깨알을 모두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시간여를 걷다 돌아오니 세탁기도 맞춤 맞게 제 할 일을 끝낸다. 발코니에서 말쑥하게 삶긴 빨래를 탁탁 털어 너니 그리 개운할 수가 없다. 더러운 찌꺼기와 묵은내를 걷어낸 청량함이라니. 수건에 코를 대어 숨을 한껏 들여 마신다. 뽀얀 수건은 볕 속에 뽀송뽀송 말라가겠지. 지루한 장마도 언젠가는 그칠 것이기에.
-2020년 비 그친 여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