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조마한 손가락
세월 앞에 무뎌지는 건 흐릿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도 슬프고 괴로웠던 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나브로 옅어진다. 또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았던 일도 처음에 생생했던 감각은 점점 옅어지며 자연치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몸만큼 신기한 것도 없다. 문득 내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유독 잔금이 많아서 스스로 삶의 역정이 지난하리라는 내 예감은 적중했다. 이젠 그 질곡과도 같은 경험이 응축되고 녹아 마음의 심지를 돋우는 중이다. 왼손 검지 둘째 손가락 마디엔 40년 전의 상처가 아직도 오톨도톨하게 남아있다.
아버지께 떼를 썼다. 토끼 두 마리와 토끼장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유는 토끼고기가 먹고 싶어서였다. 어느 날, 친척 할머니가 양은 냄비에 무얼 갖다주셨다. 뚜껑을 열어 보니 빨간 양념으로 조린 토끼고기였다. 저녁상에 그게 올랐다. 아버지는 숟가락 댈 짬도 없이 우리 세 자매는 냄비 속의 고기를 허겁지겁 퍼먹었다. 소고기 맛이 아마 그렇게 맛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조른 건 그때부터였다.
아버지는 농사일이 바빠 토끼까지 기를 형편이 안 된다고 하셨다. 토끼풀은 누가 뜯어다 줄 것이냐기에 초등 4학년인 나는 자신 있다고 큰소리쳤다. 토끼장을 지어주고 토끼만 사준다면 다 키울 수 있다고 했다. 내 채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고 결국, 아버지는 토끼장을 만들어 주고 토끼를 두 마리 사 오셨다. 토끼장을 만드는 일도 여러 날이 걸렸다. 토끼들의 환경을 생각해 바닥에서 1m 높이로 올리고 넓게 짰다. 혹시라도 족제비에게 물려갈 위험에서 피하기 위함이었다. 털이 하얀 토끼 한 마리와 재색 토끼 한 마리를 토끼장에 넣어놓으니 녀석들이 어리둥절 두리번거린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지런히 토끼들을 돌봤다. 토끼는 클로버도 잘 먹고, 칡잎도 잘 먹었다. 자그마한 입으로 오물오물 풀잎을 여물게 씹었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크게 솟은 듯 쫑긋한 귀가 더 앙증맞았다. 나는 토끼 앞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밥 잘 먹고 잘 있었느냐는 둥, 뭐 하고 놀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럴 때면 토끼는 커다란 귀를 연신 쫑긋거리면서 내 얘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겨울이 왔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풀이 지천이라 먹이 구하기가 수월했는데 겨울이 되니 풀이 없었다. 두 마리였던 토끼는 새끼를 쳐 여러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엄마 토끼는 갓 낳은 토끼를 사람이 만지면 물어 죽였다. 토끼가 아닌 다른 동물의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챈다는 것이다. 금방 태어난 토끼는 쥐새끼처럼 빨갰다. 나는 눈도 못 뜬 어린것들이 꼼지락대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녀석들이 얼른 자라기 위해서는 풍부한 먹이가 필요할 것 같았다.
가을걷이한 늙은 호박이 마루에 놓여 있었다. 늙은 호박은 껍질이 매우 단단했다. 아버지가 식칼로 반을 가르고 그 속에 있는 속을 파낸다. 호박씨는 나중에 말려서 껍질을 벗기면 아주 고소했기에 우리의 주전부리였고, 파낸 속은 쇠죽솥에 넣어졌다. 늙은 호박으로는 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호박죽을 쑤어먹기도 했다. 잘 익은 호박은 설탕을 굳이 넣지 않아도 꿀처럼 달콤했다. 모양도 찌그러지고 제대로 여물지 못한 호박은 잘라서 가축들의 먹이로 쓰였다. 이미 속을 파내고 절반 정도가 조각이 난 채 쟁반에 놓여 있었다.
나는 조각난 호박을 토끼에게 줘도 되느냐고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방안에서는 가족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왁자지껄했다. 아버지는 그러라고 하셨다. 쟁반에 놓인 무딘 칼을 들어 호박을 쿡 찍었다.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토끼에게 호박을 갖다줬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또 칼로 찍었는데 들어보니 칼끝이 보이지 않고 제대로 꼽히지 않은 듯 보였다. 호박을 땅에 떨어뜨릴까 봐 나도 모르게 호박 끝을 잡고 칼로 찔렀다. 바로 그 순간 뭔가 매운 회초리에 맞은 충격이 왔다. 자지러지는 통증, 손가락이 팔딱팔딱 뛰는 듯 욱신거렸다. 칼이 손가락을 찌른 것이다. 쿨렁쿨렁 넘치는 피로 인해 손은 피범벅이었고 손가락은 반은 잘려 나간 듯 너덜거렸다.
통증보다 순간 놀라고 당황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마음만 동동거렸다. 그 다급함에도 가족에게 알리지 못한 건 엄마에게 꾸중 들을까 그게 더 겁났다. 그 찰나의 망설임에도 피는 그칠 줄 모르고 겨울 해는 짧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아프고 시린 손을 밤색 코르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손은 더 욱신거려오고 피는 바지 주머니까지 적시며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꾸중 들을까 봐 겁에 질린 나는 집 밖으로 나와 큰집으로 갔다. 예전에 손을 베었을 때, 큰엄마가 갑오징어 뼈를 갈아서 상처에 뿌린 후 헝겊으로 싸매준 기억이 있어서였다. 큰엄마는 건넌 방에서 재봉틀 일을 하고 계셨다. 큰엄마께 다쳤다는 말은 못 하고 갑오징어 뼈가 있는지 여쭤보니 없다고 하셨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고샅으로 나오니 막막하기만 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는 결국 깜깜해져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추운데 왜 밖에 돌아다니느냐고 묻다가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채셨다. 내 바지에 묻은 피를 보시고는 깜짝 놀라 내 손을 살폈다. 이미 한참 시간이 흐른 뒤라 피는 처음처럼 많이 흐르지 않았고, 내 손은 굳은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다쳤는데 왜 일찍 이야기를 안 했냐고 물으시는데 나는 혼날까 봐 그랬다고 하고는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엄마한테 애를 어떻게 잡기에 다쳤는데 말을 못 하느냐고 역정을 내셨다. 이 손을 가지고 추운데 어떻게 돌아다녔냐고 혀를 차셨다. 내 손가락을 자세히 살피시던 아버지는 날씨도 추운데 덧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고, 혹시 힘줄이 끊어진 것은 아닌지, 만약 끊어지면 손가락을 못 쓴다며 사색이 되어 혀를 차셨다. 손가락은 힘줄이 튀는지 계속 팔딱거렸다.
다음날이 되자 욱신거림은 한결 덜 했다. 상처를 살펴보신 아버지가 피를 많이 흘린 것 치고는 괜찮을 것 같다며 다음부터는 칼이나 연장은 절대 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자칫 잘못해 다치는 날에는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상처는 꽤 오래갔다. 내 왼쪽 검지 두 번째 마디에는 울퉁불퉁한 흉터가 생겼다. 만약 조금만 더 깊었다면 인대가 끊어질 것은 불 보듯 훤했다. 그 손가락은 두고두고 쓰라렸다. 상처가 다 아물어 붙어도 아린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토끼는 토끼 장수에게 넘겨졌다. 토끼집도 부숴서 아궁이로 들어갔다. 토끼 키우다 애 잡겠다는 아버지의 염려 때문이었다. 어린 딸이 혹시라도 장애가 남아 불행하게 될까 봐 염려하시는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내 손가락을 다쳐 상처를 싸매줄 때,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르시던 모습에 난 더 죄송했다.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신 아버지가 계셨기에 흉터가 손에만 남았다. 만약 두 분 다 나무라기만 하셨다면 내게는 손에 난 물리적 상처보다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동안 왼손을 감추고 다녔다. 혹시라도 누가 내 검지의 흉터를 볼까 싶어서였다. 처음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울퉁불퉁하던 상처는 시간이 지나자 흐릿해졌다. 쓰라린 아픔도 없어졌고 손가락 놀림도 자연스러웠다. 나중에는 상처가 생긴 것도 잊고 살았다. 하지만 늙은 호박만 보면 그날의 사건이 불쑥 떠오른다. 그 엄청나게 아프고 팔딱거렸던 기억으로 인해 무디고 시커먼 식칼이 겹쳐 보인다. 상처는 각인되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장애는 남지 않았으나 아버지에게 자식은 언제 다칠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손가락이다.
내가 꾸중 들을까 두려움에 떨었고, 그런 심리를 알았음에도 나도 내 자식이 조그마한 상처라도 입으면 나무라기부터 했다. 아들이 과자를 먹기 위해 봉지를 자르다 가위로 입술을 살짝 잘랐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음에 반복되지 않도록 호되게 야단친 적이 있다. 다친 자식을 보니 속상한 마음으로 그랬지만 두고두고 미안함이 예전의 상처와 겹쳐서 상기된다. 걱정과 조바심에 했던 말과 행동이 아들에게 큰 상처가 된 것은 아닌지.
이제 성인이 된 아들과 가끔 만나 식사하면서 아들에게 혹시라도 남을 흉터가 옅어지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보듬는다. 엄마가 그땐 무지하고 몰라서 그랬노라고. 마음 다치지 말고 마음이 편해졌으면 한다고. 아들은 내 마음을 아는지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