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 알

나는 해결사가 아니었다. 가교자였다.

by soo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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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재 판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도다. 야채와 청과는 보관 상태에 따라 신선도가 유지되는 기간이 제각각이다. 신선도가 떨어지면 바로 폐기한다. 그래서 상태가 좋지 않은 식자재들은 마트 뒤편에 잠시 모아 두었다가, 어느 정도 양이 쌓이면 한 번에 폐기장으로 보낸다. 어느 날 재고를 확인하러 창고로 가다가 누군가 청과 폐기물 더미를 뒤적이는 모습을 봤다. 직원은 아니었다. 그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과일을 하나씩 들어 보고, 요리조리 살피며 냄새를 맡았다. 마치 매일 해오던 일처럼 능숙했다.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깔끔한 용모의 노인이었다. 그는 사과 하나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상품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망설임 없이 폐기했다. 재고를 남기지 않기 위해 태워버리는 명품 브랜드처럼, 상품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가치가 떨어졌을 뿐,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필요한 물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내가 그동안 내렸던 많은 결정들이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꽤 자신만만했다. 지방 마트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마케팅을 강화하고, 좋은 상품과 새로운 프로모션을 진행하면 마트 매출을 견인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많은 부분에서 기존의 방식은 지우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물론 잘 된 것도 있고, 무리하게 진행한 것들도 있다. 긍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극단적이었다. 폐기 기준을 새로 만들고, 상품 진열 방식도 바꿨다. 그래도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해 왔다. 지금은 시기가 조금 맞지 않았을 뿐, 결국은 좋아질 것이라고.


그랬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농산물 유통의 구조적인 부분이나, 직원들 각자의 계획 등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디를 파도 사정과 이유가 묻혀 있는 무덤들뿐이었다. 내 열정도 하나씩 무덤 속에 파 묻혔다. 그렇게 무기력이 나를 덮쳤을 때. 사과 하나를 챙겨가는 노인을 만난 것이다. 갑자기 마주한 노인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저 노인은 과일을 사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내가 세운 폐기 기준은 정말 적절한 걸까?


그 장면을 본 뒤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질문은 상품의 가치였다. 나는 늘 두 가지 선택만 해왔다. 팔거나, 폐기하거나. 하지만 신선도가 조금 떨어진 사과도 고기를 부드럽게 재우는 데는 충분히 쓰일 수 있다. 모양이 조금 좋지 않은 과일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 완벽하게 처리한다고 믿었던 결정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단순한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3월 말부터 원주에도 쿠팡 로켓프레쉬 배송이 시작된다. 내년에는 근처에 창고형 마트인 이마트 트레이더스도 들어설 예정이다. 여기에 지난주에는 이란과 미국의 전쟁까지 터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가 아니라 ‘S마트는 고객들과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이 바뀌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무기력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거래처와 고객과 식자재가 더 편하고 합리적으로 오갈 수 있도록 이어 주는 일이었다. 나는 해결사가 아니었다. 가교자였다.


몇 주 동안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때는, 위기의 마트를 잘 안착시키는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과 조금 달랐습니다. 마트 운영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달아 생기자, 글을 쓰는 일도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내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그동안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던 글쓰기조차 부담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을 이야기로 풀어내려 할수록,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쓰고 싶은 방향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채 깜박이는 커서만 한참 바라보다 노트북을 닫은 날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음과는 다르게 계속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 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문제는 현실보다, 제가 만들어 놓은 틀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연재는 성공적인 이야기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는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있었던 겁니다. 제대로 부딪혀 보기도 전에,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앞에서 넘어지고 있었던 셈이죠.


그때, 사과 한 알이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저는 그런 질문들을 계속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만들어 놓은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면서요. 그래서 당분간은 틀을 조금 깨 보는 데 시간을 쓰려고 합니다. 그 이유로, 마트 경영에 대한 이 연재는 여기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예상 매출 초과 달성!” 같은 통쾌한 결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이 연재를 읽어 주시고, 꾸준히 좋아요를 눌러 주신 분들, 댓글로 응원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다음 글은 아마, 제가 계획하지 않은 방향에서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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