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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드키커 Apr 01. 2024

몸은 안 씻어도 정리와 청소를 하다가 생긴 일

정리와 청소는 즐거워! 근데 왜 나 힘들지?...

아주 어렴풋한 초등학생 시절부터 정리는 나에게 취미이자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즐거운 놀이였다.


유난히 화가 나는 날이면 옷을 보관하는 플라스틱 5단 서랍장과 물려받은 낡은 책상의 모든 물건이 자리에서 나와 새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곤 했다.


정리의 기본 원칙은 '비움'이지만 당시 어려웠던 가정형편상 그것은 적용될 수 없는 허상이었다. 나에게 정리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하. 나. 도. 비우지 않고 예쁘게 배열하는 것이었다.


추억과 애정이 담긴 물건들을 끌어안고 산지 25년, 나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삶을 유튜브를 통해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획기적인 삶의 방식을 내 삶에도 적용시키고 싶어 처음엔 몇 년째 꽂혀있기만 한 문제집을, 다음엔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 하는 속옷, 무릎이 늘어나다 못해 가만히 서있어도 무릎을 굽힌 것 같은 바지... 들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공간을 비우니 청소가 간편해졌다. 청소의 디테일도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어? 나 정리랑 청소 좋아하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을 가꾸는 일을 마스터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과정들은 이후 결혼생활에서 내가 집안일에 미쳐가기 시작하는데 도화선이 되었다.


29살 신혼공간에 나는 내 몸을 갈아 넣었다. 킬각을 맞춘 티셔츠 접기, 무한 빨래, 머리카락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바닥... 1.5룸의 오피스텔은 윤이 나고 광이 났다. 나는 안 씻어도 집은 청소해야 했다.


이 생활은 아이를 낳고도 이어졌다. 첫째를 낳고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은 '어머 아이 키우는 집 같지 않게 깔끔하네요'라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둘째를 낳고 이사한 집에 8층 언니가 놀러 왔을 땐 '여기는 모델하우스 같아 ~' 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이제 이 생활이 지친다.

아이 둘을 재우고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기 위해 젖은 솜 같은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나온다. 몸은 본능적으로 보상을 원하고 나는 이에 충실하게 정제탄수화물 또는 혈당스파이크를 일으키는 무언가를 착실히 도 입에 쑤셔 넣는다. 연료가 가득 채워진 몸은 기계처럼 꾸역꾸역 설거지를 해내고 빨래를 분류하고 장난감을 정리한다. 이렇게 한 시간 정도 집안일을 하고 나면 잠이 드는 게 아니라 잠이 나를 덮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방긋 웃는 딸내미의 얼굴이 비몽사몽 한 정신 속에서 악몽처럼 느껴진다.


삶을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정리와 청소를 하는데,

이젠 삶을 위한 정리가 아닌, 정리를 위한 삶이 되어버렸다.

지친다. 뭔가 달라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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