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 스위치를 끄고 살아가는 것

고립도 성장이 아닐까?

by 마작가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했다. 재미로 하는 성격테스트이지만 MBTI 유형 검사에서도 항상 INFP 혹은 ENFP가 나왔다. 인류애 넘치고 공감 잘하기로 유명한 그 ENFP, INFP 말이다. 어릴 때는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게 목표였을 정도로 사람을 좋아했다.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왜 싸우고 전쟁하며, 어른들은 왜 사이가 틀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수했다. 그냥 서로를 이해하고 손잡으면 해결되지 않을까,라고 믿을 만큼 낙관적이었다.


10대 시절에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바빠졌다. 옆에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여기 한 명 한 명 모두가 나처럼 이름 세 글자가 다 있을까?', ' 그럼 그 이름이 뭘까?', ' 어디로 가는 걸까?', '저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또 중학교 친구들에게는 “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라고 진지하게 말하기도 했다. 말을 들은 친구는 킥킥거리며 나를 놀리곤 했다. “넌 그럼 살인자같이, 범죄자도 사랑하냐?”라는 장난스러운 물음에 “아... 그 사람은 빼고!”라며 웃던 기억이 난다. 학년을 올라갈 때나 중고등학교 진학 등 학교가 바뀔 때 친한 친구와 소원해지면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는데도 나는 추억을 떠올리면서 유난히 아련해져 오는 마음을 달래는 때도 많았다.


20대가 되어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좀 웃긴 예를 들자면, 온라인게임에서 랜덤으로 만난 사람들과 길어야 40분, 50분 게임했을 뿐인데도, 게임이 끝나면 그들과 멀어진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슬펐다. “우리는 함께 팀워크를 나눴는데, 왜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라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흘려보내는 걸 잘하지도 못했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서른이 되니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천천히 깨달아 가고는 있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사람을 좋아하고 공감하면 되는’ 단순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현실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른 즈음에야 비로소 그 복잡한 현실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부족함 때문에, 혹은 '그냥' 누군가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타심보단 이기심이 지배적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게다가 물질주의 짙은 사회가 더 인간사회를 삭막하게 하기도 한다는 걸 배웠다.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만 ‘사람을 좋아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사람들을 좋아하는 만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정받거나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미움받기도 했다. 누군가가 싫어하면 자신도 그 사람을 싫어하고 마는 이도 많지만, 나는 마음 아파하며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지 않길 바랐다. 관계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주변인에게 상담해 보며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 애썼다. 하지만 관계란 원래 복잡하며, '그냥' 싫어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몰랐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몇 번 겪은 데이터가 있었다면 학습을 했었어야 했다. 나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기준, 나쁘게 말하면 선입견, 편견도 세워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늘 다시 모든 데이터를 지우고 백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사람을 대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는 과거의 상처는 잊은 듯 진심을 다했다. 사람은 다양하니까. 내가 받은 상처를 새로 만난 사람에게 전가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비슷한 패턴의 상처가 반복되는 일도 잦았고, 조금 늦게서야 나는 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적당한 방법을 몰랐고, 무작정 내 감정을 억압하는 방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공감의 스위치를 꺼버리고, 마치 로봇처럼 세상을 대해보자는 마음을 품었다. 공감이나 이타심이 저절로 나오려고 하면, 의식적으로 적당히 흘려보내려고 노력했다. 힘든 일이나 신나는 일을 누군가 공유하면, 기대되는 반응의 텐션이 있을 것인데, 나는 다소 기계적으로 "응 그랬구나" 라 반응하게 됐다. 성격의 일부로 자리 잡아 주변인조차 "너 무슨 로봇 같아" 라 하기도 했다. 누군가 날 싫어하면 나도 싫어하거나 그 집단을 떠났다. 태도를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을 만나는 횟수, 대화를 나누는 횟수도 줄여갔다. 대화의 소재도 가벼운 것 위주로, 진지한 이야기나 공감이 필요한 대화는 자제했다. 관심이 생겨도, 더 묻고 싶어도, 심지어 그 사람이 좋아도 이내 그만두었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쌓아가는 데에는 적합하진 않겠지만, 어쨌건 마음이 괴로워지는 일 자체가 줄어들었다. 예상외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마음에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줄어들면서, 편해졌다. 기쁜 일도 줄었지만, 상처받을 일도 함께 줄어드니 괴롭지 않고,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혼자도 꽤 편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인류애를 상실해 가거나, 고립되어 버리진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런 과정들은 내게는 나름의 성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설령 고립되어 버린다고 해도 그것이 나쁜가? 나 스스로 질문했을 때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대신, '그것이 내게 나쁘게 작용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럴 수 있다.'라는 게 나의 답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정도가 지나쳐 혹 우울감이 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으니까. 어느 쪽이 정답인지 찾기 어렵다. 애초에 정답 같은 건 없는 걸 수도 있고, 다만 나는 내게 더 나은 답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그래도 아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사랑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소수 있다. 나 스스로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도 원하지 않는다. 그 능력이 나를 아프게 한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 능력이 나의 가장 빛나는 부분, 보석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값지게 그 마음을 쓰고 싶다.




(참고로 지금은 INTP, ISTJ , INTJ 번갈아 나온다. 그래도 F는 여전히 30%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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