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뽀로예 Aug 14. 2021

빛의 이야기로 초대합니다 - 앨리스 달튼 브라운展 리뷰

넘치는 빛, 화려함을 그리다

빛의 이야기로 초대합니다 - 앨리스 달튼 브라운展 

정적인 순간 @Alice Dalton Brown

사람들의 언어는 참 재밌다. 멋진 그림을 보고 "현실같아"라고 말하는 반면, 멋진 현실을 볼 때는 "그림같다"라고 말한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들이 한 술 더 떠 재밌는 이유가 있다. 딱 "현실같아"와 "그림같아"의 중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앨리스 달튼 브라운展을 관람하기 위해 2호선 삼성역으로 향했다. 왕복 약 2시간이 걸렸지만, 차마 눈으로 담지 않고는 못 배길 역작(力作)들을 보기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았다. 입장권을 받자마자 '오기 참 잘했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로서 전시회장에서 'PRESS' 이름표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 전시회에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지니 뮤직 이용권'을 통해 들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회에 '반했다'.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하늘의 천」


마이아트뮤지엄에 들어서니 입장도 하기 전부터 아주 화려한 세트가 전시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아낌없이 앨리스 달튼 브라운 작품 몇 점을 전시해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덕분에 입장까지 약간의 대기 시간이 있었지만 시작 전부터 '보는 즐거움'과 '찍는 즐거움'에 취할 수 있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展은 "Where the Light Breathes"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는다. 즉 이곳의 작품들은 '빛이 머무는 자리' 혹은 '빛이 숨쉬는 자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명 그대로 작품을 보는 내내 빛이 나의 동선을 따라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 자리에서 빛과 내가 함께 숨쉬고 있는 듯한 기분. 분명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둑한 반면 작품에서 보이는 빛만이 선명한데, 그 부분적인 그림의 빛에 압도되어 마치 그 빛이 현장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맞이한 '빛'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실감할 수 있었다.  


나를 멈추게 한 작품들 - 여름에 보는 <여름 바람> 시리즈

 

1부부터 4부까지 다채로운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나의 발걸음이 더 오래 멈춘 그림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3부 <여름 바람> 시리즈다. 2021년 8월의 여름에 보는 2000년대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여름은 강렬하고, 아름다웠고, 화창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한 친구의 집에서 보았던 '커튼이 휘날리는 모습'에 꽂힌 것처럼, 나 또한 그녀가 그린 여름&커튼 조합에 특히 눈길이 갔다. 


여름 바람Summer Breeze @Alice Dalton Brown

전시를 둘러보면서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참 한결같은 사람이란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마 굉장히 질서정연한 사람이며, 원칙주의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한 습작을 그렸고, 더 완벽한 실제 작품을 그렸다. 습작에서 그린 풀 색깔이 실제 작품에서 진해지거나 살짝 달라진다는 점같이 자잘한 부분을 빼고는, 그녀는 처음 본 시선과 구도 그대로 작품을 빚었다. 커튼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는 각도, 강가에 빛이 내리는 세기 등 대부분의 것이 그대로였다.  


오기가 작동해 습작과 실제 작품 중에서 과연 어떤 부분이 조금이라도 다른지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느낀 '빛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그리길 원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에는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는 카메라가 장착돼 있었나보다.


창에 비친 산딸나무 Dogwood Reflected @Alice Dalton Brown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산딸나무의 핑크빛 꽃들이 우리 할머니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는 평생에 걸쳐 내가 잊을 만하면 50송이,100송이씩 선물해 주셨다. 꽃다발을 주셨던 할머니의 얼굴이, 순간 저 산딸나무의 꽃에서 겹쳐보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물이 제멋대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데, 이 눈물의 의미는 '감동'인지 또는 '추억'인지 그 자리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리뷰를 쓰는 지금에서야 감동과 추억이 한 데 모인 본질에는 '사랑'만이 자리한걸 깨닫는다.  


전시회가 끝나고 기념품 샵에서 이 그림이 그려진 노트 하나를 구매했다. 속초에 계신 할머니께 곧 선물할 예정이다. '창에 비친 산딸나무'를 통해 할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황혼에 물든 날Long Golden Day @Alice Dalton Brown


'Long Golden Day'는 작가의 여동생 집에서의 통유리창을 모티프로 삼았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커튼이 걸린 베란다와 카유가 호수를 합성한 그림이다. 상상력만으로 이렇게 소름돋도록 현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평소 물과 커튼에 비치는 햇빛의 감각을 얼마나 동물적으로 인지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 그림이 걸린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정면을 응시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처럼 내 마음도 덩달아 고요해짐을 실감했다. 아마 작가도 휴식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들떠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안정적이면서도 참으로 세밀한 붓의 흔적이 돋보였다. 


느지막이 부는 바람Late Breeze @Alice Dalton Brown

거튼에 비친 나뭇가지의 그림자, 바다에 비친 무수한 빛의 입자, 파도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곡선의 물결. 이 작품은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표현할 수 있는 'Where the Light Breathes'의 총집합을 나타냈다. 


바다 위에 붕뜬 커튼이 어디에 매달려있는지 우린 알 수 없다. 이곳은 외딴 섬인가? 혹은 여전히 친구의 집 또는 동생의 집인가? 휴양지의 숙소인가? 이곳의 '장소'에 대해서 우린 오직 질문만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바다와 구름, 빛과 그림자, 나무와 커튼의 환상적인 조화가 빛의 이야기를 함께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마치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조화롭게 은은한 소리를 내는 작품이다.   


밤이 드리운 아카데미 Night Over the Academy @Alice Dalton Brown
넘쳐나는 빛, 화려함.
여름은 강한 인상을 남기고
모든 영혼을 행복으로 몰아넣는다.

-앙드레 지드


지루한 일상, 단조로운 삶에서 환기가 필요하다면 앨리스 달튼 브라운展을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이 글에서 소개한 3부 <여름 바람> 외에도 1부 <빛과 그림자>, 2부 <집으로의 초대> 그리고 4부 <이탈리아의 정취>에서 더 다채롭고 독특한 작가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展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2021년 7월 24일부터 10월 24일까지, 작가가 그린 '넘쳐나는 빛의 화려함'을 뽐낸다.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이번 전시를 통해 여름이 강한 인상을 남기고, 모든 영혼을 행복으로 몰아넣는 감각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길 바란다. 


https://www.artinsight.co.k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