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산울림 편지콘서트의 주인공, 쇼팽
학창시절 음악 수행평가를 보면 꼭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었다. 예술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 사람들.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드뷔시, 쇼팽.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술가의 삶과 철학에 대한 선생님의 정성스러운 설명이나 열변을 토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녹음 파일에 있는 곡들을 들어본 후, 작곡가와 곡명을 제대로 적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음악 시험에도 정답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는 역시나 그 정답을 알기만 하면 되었고, 정답 그 이상의 배경과 철학, 삶들은 궁금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 후로 음악에 대한 고찰은 전무했다.
다만 삶의 어느 순간 답답한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그 유명한 전설의 곡들을 들어도 마음의 한계선 이상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벽이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났다. 이 음악가는 왜 이렇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하고 어두운 음악을 쓴 걸까. 왜 이 대목에서 졸고 있다가도 깜짝 놀라 동공이 번쩍 떠지는 포르티시모(아주 세게)를 썼을까.
음악은 분절될 수 없는 모든 삶의 점들을 총체적인 덩어리로 묶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일 경우에 그 총체성은 더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이 음악을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써서 ‘정답’을 내는 것은, 지나고 보니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런 놀이는 AI가 사람보다 백만 배 더 잘한다. 사람인 우리에게 한 가닥의 감동이 되는 것은 음악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메타적인 의미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이 당시에 곡을 쓸 때 이 작곡가는 삶의 어떤 터널을 지나고 있었는지. 도대체 그에게 어떤 방아쇠가 당겨졌길래 이런 풍의, 분위기의, 정서의 곡들을 써 내려갔는지. 이런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이야기들만이 그 의미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2월 말 관람했던 ‘산울림 편지 콘서트’의 ‘쇼팽, 블루노트’는 오래 풀리지 않았던 ‘음악가의 삶과 창작 동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계기였다. 아트인사이트 문화 초대에서 가장 반가운 향유 내용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바였다. 하나, 향유 장소에 집에서 가까울 것. 둘, 오래 궁금해했지만 시간과 흥미의 부족으로 아직 파헤쳐 보지 않은 장르일 것. 아주 반갑게도 ‘쇼팽, 블루노트’는 두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공연이었다.
시놉시스
“뭔가 괴로울 때, 난 친구에게 말하듯 피아노에게 말을 겁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연인이었던 작가 조르주 상드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음악과 삶을 회상한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폴란드에서 태어난 쇼팽. 그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으로 “새로운 모차르트의 탄생”이라 불리며 폴란드인들을 흥분시켰지만, 조국의 불안한 정세와 자신의 음악적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인해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파리. 멘델스존, 리스트 등과 같은 동년배의 피아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던 새로운 음악의 중심지에서, 쇼팽은 당시 사교계의 스타이던 도발적이고 자유로운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이번 ‘쇼팽 블루노트’ 공연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연극이었다. 피아노 연주와 연극을 동시에 향유하는 공연이 있다니. 무대를 보는 내내 이곳이 연극 무대인지 연말 연주회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배우들의 연기를 볼 때면 완벽하게 연극을 보고 있다가도,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릴 때는 소극장 연주회에 온 느낌이 가득했다.
이 특별한 무대를 올린 ‘산울림 편지 콘서트’는 클래식 라이브 연주와 드라마를 통해 불멸의 음악가들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하고자 기획됐다. 2013년부터 베토벤, 모차르트,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작 등 세기의 위인들을 다룬 음악극을 꾸준히 올렸다. 해마다 겨울과 가장 어울리는 고품격 공연을 고수하는 대표 명사가 된 것이다.
2024년의 편지 콘서트는 지난해 2023년에 이어 또다시 쇼팽의 음악을 담아냈다. 초연에 이어 이번에도 배우 류영빈과 이다해가 각각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 역을 맡았고, 피아니스트 피오트르 쿠프카와 히로타 슌지가 번갈아 무대에 올라 쇼팽의 음악을 생생한 피아노 라이브로 전달했다. 이번 공연에 오른 피오트르 쿠프카는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 뤼벡 국립음대 피아노를 최우수 졸업하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반주과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인정받은 음악가의 라이브 연주를 집 근처 소극장 산울림에서 향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과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가, 이번 ‘쇼팽, 블루노트’는 쇼팽의 인생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두꺼운 챕터가 되는 사랑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 조국인 폴란드에 대한 쇼팽의 사랑과 그리움. 아버지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보낸 음악적 전성기.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의 작가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진 쇼팽의 영혼과 정서. 9년에 걸친 사랑의 기간 동안 펼쳐지는 조르주 상드와 쇼팽의 우여곡절을 통해 쇼팽의 인생길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단 두 명의 배우, 그리고 한 명의 연주자가 이끄는 95분은 인터미션이 없었지만 그야말로 빈틈이 없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전쟁, 연인 상드와의 만남과 이별 등 쇼팽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려냈으니 39년의 시간을 단 1시간 35분 만에 풀어낸 것이다. 쇼팽 역을 맡은 배우 류영빈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조르주 상드의 이다해 배우는 서술자와 쇼팽의 연인 상드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소화했다.
Program
01 Polonaise Op.40 No 1 in A Major 'Military'
02 Waltz No.9 in A flat Major Op. posth. 69-1
03 Etude in c minor Op.10 No.12 (Revolution)
04 Waltz No.4 in F Major Op.34 no.3
05 Ballade No.3 in A flat Major, Op.47
06 Prelude in D flat Major Op.28, No.15
07 Nocturne No.20 in c sharp minor, Op. posth
08 Mazurka in a minor Op.17 No.4
총 9개의 라이브 연주곡은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마다 진행됐다. 쇼팽이 삶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배우들은 잠시 멈춰 서거나 무대에서 자리를 비움으로써 라이브 연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줬다. 쇼팽과 상드가 서로의 숨길 수 없는 마음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녹턴 2번'이 무대를 휘감았다. 상드가 비에 젖어 쓰러진 쇼팽을 돌보는 순간에서는,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며 절절하고 짙은 정서를 한층 더 깊이 전달했다.
라이브 연주로 쇼팽의 음악을 현장에 듣자마자 깨달았다. 음악이 곧 그였고, 그가 곧 음악이었다. 쇼팽 그 자체가 피아노였다. 쇼팽의 음악이 왜 그토록 서정적이고 섬세한지, 몽환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게 느껴졌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는 매우 병약했고, 연약했고, 자주 쉽게 쓰러졌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신념으로 음악과 사랑을 지켜내고자 노력했다. 세월의 중력에 휩쓸려 결국 3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지만 쇼팽의 황금 같은 곡들이 말해줬다. 그는 화려한 기교를 넘어서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어루만지는 단단한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쇼팽의 마지막 순간에 조르주 상드가 없다는 사실은 가슴이 저릿했다. 쇼팽이 떠나는 길에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9년간 서로를 사랑했지만 끝내 서로 원망하며 헤어졌던 그들. 사랑의 끝이 연약하고 으스러져가는 모습으로 기억되기 싫었을 것이라는 조르주 상드의 해설이, 왜 그녀가 장례식에 가지 않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그저 마음이 아팠다.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는 아픔. 그리고 그 아픔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감정. 사랑의 끝을 연약하고 부서지는 모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을 조르주 상드의 심정은 누구든 쉽사리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드의 이런 선택을 이해하면서도, 그 선택 자체가 주는 슬픔과 안타까움 또한 관객인 내 마음에도 흘러넘치는 것이었다.
어쩌면 사랑의 본질적 끝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와 같은 해피엔딩이 아닌 '아지랑이 같은 사라짐'이 아닐까. 무언가 분명히 존재했지만 점점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무엇인 것.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듯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감정이나 기억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그런 느낌.
그래도 쇼팽은 인생 내내 사랑을 연기처럼 흩어지게 놔두지 않았다. 그의 삶과 사랑을 음악의 모든 음에 빼곡히 채워넣었다. 사라질 무언가의 본질을 붙잡아두는 가장 강력한 '의미의 함축'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쇼팽의 음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감정의 보관함이었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쇼팽을 이렇게 표현했다. “쇼팽은 그의 모든 인생을 피아노에 바쳤고,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그를 피아노의 절대, 절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어떤,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훨씬 더 피아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벌써부터 다음 해 산울림 편지 콘서트가 기대된다. 다음에는 쇼팽이 아닌 또 다른 음악가의 삶을 2025년에 초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받아볼 또 다른 나의 12월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