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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진 Mar 03. 2021

영화 기생충(Parasite, 2019)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는가

‘높은 곳’과 ‘낮은 곳’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발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 불신자가 되거나,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7-9)

‘죽기 전에 이루어 달라’는 아구르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 2000년이 넘은 지금 인간의 사회는 지혜보다 허위와 거짓말을 더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양식’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과 양식이 넘쳐 ‘배부른’ 자가 여전히 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척박합니다. 그런 서로가 서로를 도둑질합니다.  

영화 <기생충>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의 비유로 유명합니다. 성경의 ‘높은 곳’에는 하느님과 지혜가 있지만, 세상의 ‘높은 곳’에는 권력과 부가 있습니다. 지혜와 하느님이 연결되듯, 권력과 부가 연결됩니다. 낮은 곳은 어떨까요? 성경의 낮은 곳에는 하느님 사랑이 임하지만, 사회의 낮은 곳에는 사랑의 여유가 없습니다. 영화 <기생충>은 그런 높은 곳에 사는 박동익 사장과 낮은 곳에 사는 기택의 집을 대조합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 타이틀은 '낮은 곳', 냄새나는 양말 옆, 손바닥만한 하늘이 보이는 창문에 깔렸다.

반지하방 창 앞에 걸려 있는 양말, 그 뒤로 펼쳐진 세상이 보입니다. 땅은 눈높이에 있고 하늘은 손바닥 만합니다. 주인공 가족의 이름에 모두 '기'와 '충'이 들어갑니다. 가장인 아버지 이름은 기택(송강호), 아들 기우(최우식), 딸 기정(박소담), 부인의 이름은 충숙(장혜진)입니다. 기생충 가족의 첫 대화를 통해서 이 가족이 이웃집 와이파이에 기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 이들의 눈높이보다 높은 세상에서 소독이 시작됩니다. 가족은 “공짜로 소독할 수 있다.”며 반기지만, 이내 소독약에 질식할 듯 괴로워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가족들은 생물학적으로 사람이었네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사람이기보다 이 소독약이 잡으려는 벌레에 가깝다는 이야기입니다.  

온 가족이 알바로 피자 박스를 접습니다. 피자집 직원은 이들이 접은 박스의 ‘라인이 드럽게 접혔다.’고 합니다. 무시하듯 던지는 반말투에 계층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소상공인과 거기 고용된 직원은 서민입니다. 땅 위에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밟고 있는 땅보다 더 밑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을 거듭 보여준 뒤 이제 하늘로 시선을 돌립니다.


집을 찾기 위해 하늘을 향한다.

기우가 첫 과외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는 언덕 길은 마치 어떤 경제 통계를 나타낸 그래프의 선을 보는 듯합니다. 빈부격차 추이라든가, 잘사는 사람의 부의 척도라든가... 언덕을 올라가는 기우는 집을 찾기 위해 계속 하늘을 봐야 합니다. 가진 사람들은 높이 높이 올라가 있기 때문니다. 

바벨탑을 만들던 사람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이름을 날리기’ 위해 높이높이 탑을 쌓았습니다. 중세 이후 유럽의 뾰족한 첨탑, 웅장한 지붕의 성당은 예술성의 발현이라는 이면에 신이 계시다고 인간이 믿는 그곳에 내가 가장 가깝기 위한 욕심이 담겼습니다. 그런 예술의 역사는 수많은 건설 노동자를 괴롭히는 역사로 반복되며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높이 솟은 도시의 마천루들은 단순히 부(富)만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경쟁의 산물입니다.

이 가족이 ‘높은’ 박 사장네서 기생하다가 간신히 빠져나와 ‘낮은’ 자신들의 반지하방으로 내려오는 길은 더 가파르고 더 깊고 더 멀었습니다. 그 시각 박사장네는 오랜만에 내린 비로 상쾌해지고 있었고, 기택네는 홍수로 모든 삶이 쓸려가고 있었습니다.  


계획

다시 ‘낮은 집’, 와이파이가 끊긴 집에서 뒹굴거리는 가장 기태에게 부인 충숙이 묻습니다. “너는 계획이 뭐야?”. 반면 아들 기호는 아버지 기태와 다릅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위해 연세대학교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면서 말합니다. “저는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 기택이 감탄하며 뱉은 유명한 대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명문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대학이 아니라 ‘높은’ 대학입니다. 이런 계획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기호’, ‘기정’ 혹은 ‘다혜’, ‘다송’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 이름 뒤에 ‘OO사’, ‘OO님’이라는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좋은 대학이 아닌 높은 대학을 나온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의사, 모두에게 공정한 법 적용을 진정으로 고민하는 법관, 좋은 상품과 고용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인, 국민의 지지를 마음으로 갚는 정치인이 되지 않습니다. 환자가 낫는 것보다 수술에 관심 많은 의사 ‘OOO 선생’, 법 지식을 활용하여 조직에서 치솟는 데 관심이 많은 법조인 ‘OOO 판검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돈만 벌려는 기업가 ‘OOO 대표' 국민에게 얻은 권력을 쓰면서 군림하고 누리는 일에 열중하는 정치인 ‘OOO 의원’의 타이틀을 얻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완성합니다.  

피자집 직원도 그랬습니다. ‘그런 것(박스가 ‘드럽게’ 접힌 것) 하나하나가 우리 피자집의 브랜드 이미지를 망친다.’고 했다. 이때 충숙이 비웃는다. “브랜드..?, 박스 접을 사람도 하나 없는 것들이.” 브랜드는 기업 오피스 건물 꼭대기에 걸려 있는 타이틀입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땅을 짚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피자는 브랜드보다 맛이 중요하다. 인간은 타이틀이 아닌 내면이 중요한 존재다.


‘기생충’들은 이와 같은 사회적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세워봤자지요. 기택의 가족은 능력과 노력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택은 대리운전, 자영업 등을 하며 생계를 위해 노력해 왔고, 아내 충숙은 해머던지기 은메달리스트였다. 기우도 명문대생의 영어 과외를 대신할 실력이 있고, 기정도 디자인 분야의 재능을 보여주지요.

‘기회의 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지만, 그 기회의 낙숫물은 이들의 지하방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며, “배척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도,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습니다.  

<기생충>에서 계획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박사장네 지하 벙커에 사는 근세에게, 이번에는 기택이 기택이 ‘계획’을 물었을 때, “난 여기가 편해. 난 여기서 태어난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계속 기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 사장네서 도망쳐 빗속의 긴 길을 내려온 후 기정과 기택이 번갈아 가며 가장인 아버지에게 ‘계획’을 묻자 기택은 말한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 인생이,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이 많은 사람이 ‘오늘 체육관 마루 바닥에서 떼거지로 자자’고 계획을 했겠냐?”

체육관에서 수재민이 지자체와 싸우는 장면을 배경으로 기택이 덧붙입니다. “애초부터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상관 없는 거야,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하느님 계획과 멀어진 사회적 계획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파멸로 이끌겠지만, 나라가 팔리는 상황이 오더라도 사회적 계획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사람의 삶은 여전히 공고할 것입니다. 폭우 다음 날 높은 집의 박사장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파티 준비를 구경하고, 기택은 체육관 마루 바닥에 집단으로 누워 수재민의 싸움을 지켜보는 장면이 교차되는 장면이 극적입니다.


한 사회에 공존하지만 함게 하고 잇지는 않다.

'선'은 있을까?

교황은 “배척된 이들이 더 이상 사회의 최하층이나 주변인이나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됐다.”고 말했다. 기득권이 만든 사회의 경계선은 이제 힘없는 사람을 ‘아래’에 둔 게 아니라 아예 사회 밖으로 밀어내 버렸습니다.

박 사장은 말한다. “나는 선을 넘는 사람이 싫어.” 그러나 그가 그렇게 혐오한 알 수 없는 냄새는 그의 비싼 차 안에서 공기를 타고 앞 좌석과 뒷좌석 사이의 선을 넘어 오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서 오래 기생하고 있었지만, 박 사장이 그 냄새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단지 공간이 넓어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박 사장네 거실을 차지한 날, 기택 가족은 다혜와 연애하는 기우를 두고 이 집과 ‘사돈’이 될 꿈을 꾸며 ‘김칫국을 마십니다.’ “이런 집 살 돈이 있으면 나도 연교 처럼 마음 착하겠다.”는 충숙에게 기택은 “우리 지금 여기 살고 있잖아.”, 어디 산다는 게 별 건가 이렇게 술 마시고 여기 앉아 있으면 사는 거지요. 기생충에게 마음이 있다면 이들과 같겠지요.  

박 사장네는 오래된 기생충 가족이 하나 더 있었지요. 그들이 사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길은 마치 목구멍에서 위장까지 내려가는 식도처럼 길게 이어집니다. ‘드럽고’, 당연히 ‘냄새’도 날 것입니다. 매 해 보릿고개를 넘기며 영양이 부족했던 1950, 6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 오늘날 이 땅, 지구 어디선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을 사람들의 뱃속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기택이 보기에도 이 공간은 끔찍합니다. “이런 데서도 살아지나?” 땅 밑에 지하가 있고, 지하 밑에 더 깊은 지하가 있습니다.  

회충약이 보급되고,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기생충은 문제거리가 아닙니다. 과거 빈곤 국가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몸 속 영양분이 부족하고 허약한 상태에서 침입한 기생충은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이 영화에서 반지하의 냄새나는 공간들은 사회 구조의 허약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허약한 사회 구조 안에서 서식하는 기생충은 회충약 한두 알로 해결되기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결국 영화 속 기생충은 자신이 서식하던 ‘숙주’를 잠식해 버립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드 경기에서 여러 사람이 활쏘기를 할 때, 내 과녁 아닌 옆 사람의 과녁을 겨누는 죄를 '하마르티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쏘고 그 활을 하느님의 계획 대신 인간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계획을 향해 겨눕니다. ‘스스로 깨끗한 체하면서도 제 밑은 씻지 않는 세대, 눈은 대단히 높고 눈썹은 치켜 올린 세대, 이는 단도요 이빨은 칼인 세대 ...이런 세대가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이 땅의 불쌍한 이들을 집어삼킨다.’고 잠언(30,11-14)이 우려한 사회 현실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변함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생충의 기생충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영화 속에서 박 사장과 연교(조여정) 등 부자들은 잘 속고 선량해 보이는 반면 기택의 아들딸은 능숙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며, 과연 하느님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어도 되는지 의심스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득권은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설명하며 '노력하는 만큼 잘 산다'는 자본주의의 이상주의적 논리에  몸을 숨깁니다. 그러면서 기회의 사회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그러니까 저렇게 산다.”며,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 비난하거나 외면합니다. 그러나 영화 <기생충>이 언급하는 삶의 격차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니, 공산주의와 독재니 하는 사회 구조의 틀을 넘어서는 인간의 욕심을 아우릅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가,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이 독점됩니다. '기회의 평등'은 정치에 의해 기회는 일부의 것이 됩니다.  


기우가 돌덩이를 내려놓는 순간 하늘을 향한다.

성경의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부자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가짐과 못가짐, 높고 낮음의 의미가 없는 나라입니다. 중세의 주교였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멀리하는 나라는 거대한 강도 집단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모든 국민이 교회나 성당에 다니면서 헌금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나 가톨릭의 그 신이 아니라면 플라톤의 이데아, 정치적인 유토피아와 비슷합니다. (기독교의 하느님 존재와 이데아가 똑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없지만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마음 속에서 지금까지 추구했기 때문에 허위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도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일 테니까요.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늘에 있는줄 알았나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꽃들에게 희망을>의 애벌레처럼 하늘로만 올라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바닥으로, 지하로 떨어뜨리면서. '모두 잘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민 한 번 없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희생을 담보로 잘 먹고 잘 산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진짜 기생충이 아닐까요.  

교황은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심장에는 그러한 구원의 힘이 약동하고 있다”며 “이 구원의 힘은 모두가 회개를 향한 참된 순례에 동참해 가난한 이를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하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다닌다거나,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 지혜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이 사회 안에 반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느님 지혜를 다 알 수도 없습니다. 설사 하느님을 모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졌다는 사랑의 본성이 더 강한 힘을 가져, 어쩔 수 없이 ‘기생’을 선택하는, 벌레[蟲] 아닌 사람들을 구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이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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