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둬야 갈 수 있는 것
방송작가였던 시절, 생각해 보면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휴일에 도심 나들이, 국내여행 당일치기나 1박 2일 외에는 며칠씩 해외로 가는 것은 언감생심 꿈꿀 수 없었다.
휴가를 갈 수 있는 방법은 딱 2가지였다. 방송이 몇 주씩 펑크 나거나 내가 맡았던 프로그램을 그만두는 것.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라는 특성상 방송을 쉬면 수입이 0이므로 즉, 휴가란 실업자가 되어야만 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휴가를 갈 때 날 제외해 두고 떠났다.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지만 종종 휴식이 너무 고프고 남들 하는 여행이 부러웠던 20대 막내작가였던 시절, 가족들은 태국여행을 계획했다. 나에게 휴가를 내보라고 했지만 방송이 펑크 될 일이 없던 시즌이었고 위클리 방송 준비들을 해야 하는데 “언니, 선배님 저 휴가 갈래요” 라며 철없이 나 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다고 며칠만 공석을 메워줄 대체 인력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에.
메인 작가 선배에게 ‘휴가 내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혼만 나고 안 될 것이 뻔했기에 애써 다시 속으로 삼켰다. 결국 엄마와 동생은 여행 예약과 준비를 마쳤고 여행일이 되어 태국으로 훌쩍 떠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그날따라 어두컴컴했고 적막했다. 마음 한가운데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혼자 있는 시간이 즐거웠겠지만 그날은 공기마저 우울했다.
소음이라도 있어야 덜 외로울 것 같아 TV소리를 한껏 켰다.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연속으로 감상했다. 나만의 시간을 즐겨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영화를 연이어 보다가 새벽 늦게 잠들었다.
그 이후로도 휴가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쉬자니 불안했고 휴가를 가자니 도무지 빡빡한 방송 스케줄 사이 여행 갈 틈은 없었다. 이런 패턴은 서브작가로 입봉 했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해, 가족들이 제주도로 떠나 전화로 재미있는 무용담을 전할 때 주말 출근 중이었던 나는 갑자기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가족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안 하는 편이었지만 그날따라 난 무얼 위해 이렇게 사는 걸까, 나의 낙은 행복은 뭘까, 왜 나는 남들이 하는 걸 할 수 없는 걸까 문득 서러움이 복받쳤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실연당하거나 큰 우환이라도 터진 사람처럼 지하철 안에서 소리 없이 오열했다. (다행히(?) 아무도 날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
사무실로 향하는 길, 횡단보도에서 내 앞에서 불과 2~3cm 차이로 급정거한 차를 바라보며 '아 교통사고라도 나면 아무 생각 없이 며칠 쉴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까지 갔다.
놀란 엄마는 제주도에서 올라오자마자 야근 중이었던 나를 만나러 사무실 근처 카페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에 알았다. 아 이게 번아웃이구나.
당시 월 3일 정도만 쉬고 주 7일, 하루 12시간 이상 새벽까지 일하며 역대급 가장 힘든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던 나는 이제 나를 돌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해당 프로그램을 떠나 며칠간 리프레시를 한 후, 나를 위한 짧은 휴식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밤새야 할 때 BTS, 찰리 푸스 등 좋아하는 가수들의 음악 들으며 텐션 올리기, 가끔씩 일부러 풍경 좋은 곳에 가서 계절의 흔적들을 사진에 담기, 퇴근 후에 하고 싶은 짧은 취미생활 만들기, 웃기거나 귀여운 영상들 보기, 가고픈 카페 리스트업 등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위로를 주는 순간들을.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짧은 휴식들은 조금씩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해줬고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해 줬다. 앞으로도 이 순간들은 나를 꾸준히 달리게 해줄 것이다.
우리 모두 나 자신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영양제가 되어줄 잔잔한 위로의 순간들을 찾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