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어느 변태 성욕자의 초상

미카엘 하네케 감독. 피아니스트

by 백승권




벌거벗은 여성 신체의 정면이 커버를 장식한

도색잡지에 심취한 수컷들이 득실대는

성인용품점의 방안으로 한 여성(이자벨 위페르)이 들어간다.


방안의 모니터에는 질펀한 포르노 영상이 나오는 중이고

여자는 무표정으로 영상을 응시하다가

휴지통 안으로 손을 내밀어 구겨진 휴지를 집는다.


구겨진 휴지.

이전에 들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컷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포르노 영상을 보다가

흥분에 못 이겨 분출한 액체가 묻어있을 게 뻔한

구겨진 휴지.


무표정의 여성은 구겨진 휴지를 집어 얼굴로 가져간다.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구겨진 휴지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정액의 냄새가 여성의 호흡기를 거쳐

신경과 혈관으로 퍼졌을 것이다.


여자는 피아니스트.

슈베르트를 해석하는데 박식한 교수로

명성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

그에게 배우려는 학생들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피아노 교육 방식이 원래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자의 교육법은 매우 건조하고 공격적이다.

잠재성을 끌어내려는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듣기엔 인격을 짓밟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다그치는 과정 속에서도 여자는 동요하지 않는다.


노쇠한 엄마와 같이 사는 중년의 여자.

그녀는 작은 공연 자리에서 한 청년(브느와 마지멜)의 눈에 꽂힌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다.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든다.

여자는 거절한다. 심지어 심사에서 불이익까지 준다.

하지만 청년은 아랑곳없다.

매달리고 구애하며 여자의 마음을 녹이려 안달한다.


여자는 청년의 음악적 지성과 실력에

손을 떨며 흔들리지만 애써 감추며 동요를 감춘다.

오히려 더욱 냉혹하게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청년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 웃으며 달콤한 말로 뜨겁게 다가온다.


또 다른 공연 날.

여자가 질투에 눈이 멀어

제자의 손을 피범벅으로 만들었을 때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의 미래를

유리조각으로 찢어놨을 때

여자는 자신의 '성공적' 범행 결과에 전율하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녀는 성적 흥분이 일어나기 위해

어떤 도화선과 성냥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먼 스크린 외에 온통 불 꺼진 자동차로 채워진

음란하고 퇴폐적인 어둠으로 가득한 자동차 극장에서

여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들의 카섹스를 보며

주저앉아 생리현상을 해결한다.


적어도 청년이 원하던

욕구 해결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청년은 몰랐다.

원하는 행위를 적은 여자의 편지를 읽기 전까지.

묶고 때리고 싫다고 해도 멈추지 말아달라는

아주 세세한 요구 사항이 담긴

여자의 깨알 같은 요구 사항을 읽기 전까지

청년은 몰랐다.


혼돈.

둘은 단숨에 뒤엉키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벽이 더욱 두터워진다.

청년은 두려움마저 느낀다.


청년은 왜 쉽고 단순하다 여기는

자신의 충동대로 관계가 진행되면 안 되는지

의문과 분노를 던지지만

여자는 여전히 차갑고 완고하다.


그러다 둘 다 무너진다.

여자의 소원대로 청년은 갑자기

찾아가 폭력을 저지르고

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는다.


여자의 정신도

청년의 몸도

통제가 불가능해진 상태.


기행과 비행을 일삼던 여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휘두르지 못한 칼날을

자신에게 쑤셔 넣는다.

흐려진 눈빛으로 도망친다.


영화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갑자기 조연이 등장해 지금까지의

이야기 전개와 모호한 부분, 서로의 감정과

앞으로의 진행에 대해 단서를 늘어놓지 않는다.

철저히 한 여자의 정면과 뒤를 응시하며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녀가 왜 남과 다른지 이유는 없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인지,

엄마와의 불화 때문인지,

오랜 고독 때문인지,

그래서 자기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사실 이런 이유로 남과 다른 방식으로

성적 흥분을 느낄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절대다수가 느끼는 방식으로 똑같이 성적 흥분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파괴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문제가 된다.

합의된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에.

여자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의도를 실행한다.

실행하고 균열이 일어난 지점에서

흥분과 전율을 경험한다.


피아노 선율 속에서

일상의 안온한 공기를 깨뜨리는

지식과 예술의 가면을 벗은

폭력. 광기. 자학. 퇴폐.


영화는 여자를 동정하지 않는다.

여자는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자는 재단되지 않고

영화는 의도된 미완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