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감독. 남과 여
외도는 소재로서 기능하지만 영화 내내 주인공들을 괴롭힌다. 당연한 이치다. 현실 인간 세계에서 외도란 상호 합의된 수많은 규율과 지나온 시간을 단숨에 배반하는 행위이며 파장은 둘로만 그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외도의 생명력은 꺼지지 않는다.
외도에 '다다른' 남(공유)과 여(전도연), 장애를 지닌 각각의 자녀가 있다. 핏줄에 대한 복잡하고도 개선되지 않는 피로가 멈추지 않는 삶. 이런 공통점은 긴 대화 없이도 엄청난 공감대로 둘을 묶어준다. 도망쳤던 곳, 무너지려는 순간의 자리에 서로가 있었다.
눈과 숲, 근사한 경제력과 달콤한 거리를 지켜주는 매너는 그동안의 다른 삶과 배경이 조장할 수 있는 외도의 구질구질한 면을 최대한 배제시킨다. 그만큼 흡착되는 감정의 밀도와 점도. 둘은 남편과 아내, 아이를 뒤로 하고 함께 있는 시간에 몰두한다.
처음엔 그랬다.
시간은 모든 것을 순환시킨다. 제자리에 놓여 있던 것들과 잊고 있던 것들이 스멀스멀 둘의 삶을 다시 잠식한다. 한 아이는 빗속에서 실종되고 한 아이는 당황하며 바지에 오줌을 싸고 한 여자는 약을 먹고 쓰러진다. 둘은 자신들이 원래 있던 곳을 실감한다.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스스로 지핀 불꽃을 사그러뜨릴 때가 오고 있었다. 감정표현을 늘 자제하던 아이가 아빠의 목덜미를 작은 팔로 당겨 안았을 때, 아내가 오랜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사과했을 때 그 시점은 보다 분명해지고 있었다. 외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 동시에 두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한때 둘이 만나 열과 숨을 터질 듯 내뿜던 공간에 다시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은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한 사람은 닫힌 문을 열지 못한다.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고 거기서부터 남과 여는 타인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다시 만나 지지 않는다. 잡을 수 있으면서도 동작을 멈추고, 앞선 차가 멈췄는데도 곁을 지나친다. 스스로 만든 이유들 곁에서 떠나지 못해서 감정만 무너뜨리며 이를 악문다. 눈을 붉힌다. 담배를 꺼낸다. 불을 빌린다. 숲을 바라본다.
영화가 끝난 후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이자 가장 방해가 되는 존재. 곁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미칠 것 같았지만 여자가 그랬듯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상, 아이들은 경계였다. 스스로가 만든 선, 서로를 향하되 넘지 말아야 하는 불문율.
넘는 순간, 자신은 가장 부끄러워질 테고 상대에게도 보이기 싫은 치부가 될 것만 같았다. 아이들만은 떠나지 말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과거이자 현재였고 미래이기도 했다. 무시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시간과 존재를 부정해야만 하는. 처음부터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했다면 낯선 서로에게 그리 빨리 무너지듯 휩싸이지도 않았겠지. 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장애를 지닌 아이라는 상징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숲에 떨어뜨렸던 빵조각과도 같아 보였다. 둘은 과자로 만든 집에 홀려 다 잃을 뻔했지만, 아이들이라는 빵조각이 있어 돌아오는 길을 더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숲이 더 울창했거나 눈이 더 쌓였다면 보이지 않았겠지만 둘은 더 이상 핀란드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혼미했을 때조차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돌아오기 싫었을 뿐.
영화 남과 여는 외도를 환상에 가깝게 다루지만 현실로 돌아오는 문을 아주 닫아놓지도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모두가 그 문을 여는 법을 아는 것은 아닐 테니까, 지금도 누군가는 눈숲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문이 열리지 않는 방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