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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Sep 28. 2024

가짜 자아가 진짜 자아를 지배할 때

얼마 전 가까운 사람들과 카피라이팅 클래스를 했다. 나는 말했고 나머지는 듣는 자리였다. 준비하며 떠올랐던 21가지 정도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중에 14번째 가이드는 형언할 수 없는 대상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에 도전하라는 거였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일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어렵지만 돈을 받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감당해야 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삽입한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듣는 사람들 대다수보다 나는 나이와 경력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내가 더 잘 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들은 인생에서 어쩌다 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며 나와 마주쳤고 나는 그들을 대상으로 담당한 일을 해내야 할 뿐이다. 그들에게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려주는 게 내 업무이자 의무였다. 그리고 늘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했다. 준비하며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써야 할지 알려주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그 누군가가 직접 쓰는 것 말고는 어떤 가르침도 부질없었다. 인공지능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레프 톨스토이와 데이비드 오길비와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과 한나 아렌트를 다 합쳐놓은 것처럼 잘 쓰고 그 인공지능을 잘 다룬다고 해도 직접 쓰지 않고는 결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클래스에 필요한 내용을 준비하는 내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불러낸 재앙에 짓눌렸다. 형언할 수 없는 상황에 괴로웠고 이를 문장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휘감았다. 고통은 실존적인 문제였다. 지난 수일은 유독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벌거벗겨진 채로 통째로 압착기에 들어가 있는 기분, 심정, 감각이었다. 고통은 존재했지만 원인을 추적할 수 없었다. 사람인지 상황인지 공간인지 관계인지 과거인지 기억인지 모두 다인지 허상과 망상인지 용의자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다시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학습에 의거한 스트레스는 감지할 수 있었다. 재발되었을 경우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가장 정답에 어울릴만한 근사치라고 여기고 이걸 문제로 정의한 걸까. 쓰면 단순해질까. 아니. 쓴다고 바뀐 적은 없었다. 글의 개수가 늘었을 뿐. 상황에 대한 기록이 뭔가를 해결해 준 적은 없었다. 훗날 당사자만 알아볼만한 기호 같은 말들이 흩어져 있을 뿐. 공감대가 지극히 비좁은 영역이었다. 이번은 어떤가. 재발된 상황에 맞춰 기록을 재발시킨들 어떤 효능도 짐작되지 않았다. 백지와 낙서의 차이가 없다면 낙서는 시간낭비였다. 작성자에게조차 무의미하다면 존재가치는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쓰고 싶지 않았다.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 굳이 어둠에 대한 언급이 소용없었다. 어둠을 진실과 역사로 만드는 데 견고히 기여할 뿐. 그 기여는 반복되는 낙인이었다. 넌 늘 이렇구나. 늘 같은 패턴이구나. 새로운 고난을 다시 낡은 방식으로 대처하는구나. 그러니 언제든 다시 반복되겠구나. 쓰기 전후가 같다면 쓰는 것은 쓰는 것 자체일 뿐이었다. 쓰는 시간을 통해 무형의 감정적 해소감 같은 이익이라도 취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 글은 미뤄졌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문장으로 옮겨지는 일은 계획에 없던 일처럼 시도하기도 전에 노쇼를 예정하고 있었다. 무기력한 방관이 아닌 고통의 확산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수단을 간구하고 시간을 쏟았지만 맘에 들지 않았다. 조바심이 잠식하고 있었고 자가진단으로 우울을 판결하고 있었다. 이건 우울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고. 무슨 호들갑이야 이게. 하지만 이거 외에 적당히 아는 단어가 없었다. 모든 상황을 타자에 결정에 맡기지 않았지만 숨 쉬는 모든 시간이 답답하고 메스꺼웠다. 울화가 치밀고 계속 산소가 부족했다. 잘하고 싶거나 인정받고 싶어서 내면의 발버둥을 치다가 여기까지 온 건가. 그렇게 인정 욕구에 메말랐나. 조금 달랐다. 극적인 칭찬이 처방전으로 어올리는 상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마법처럼 상황이 타결된다면? 그럴 일은 없었다. 혼돈과 현기증은 기본값이었다. 사람 탓으로 돌리면 조금 편해지나. 쉽지만 정확하지 않았다. 내 탓이나 남 탓이나 누구 머리로 조준한들 자욱한 연기는 계속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처럼 아무 가치 없는 말도 드물다.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날 뿐이지 지금의 고통과 혼란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최근 앨리슨 벡델의 책에 빠져서 며칠을 보냈다. 내가 누군가에게 얻고자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없다면 그건 그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내용의 구절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진짜 자아와 가짜 자아에 대한 언급도 흥미로웠다. 생각해 보니 나는 수십 겹의 가짜 자아에 둘러싸여 진짜 자아는 이미 형체가 보이지 않고 스스로 가짜 자아를 진짜 주체로 여기며 지내는 것은 아닌지 진단이 필요해 보였다. 내면인지 정신인지 뭔가가 파괴된 후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부작용이 누적되어 분출된 게 요즘이 아닌지. 모르겠다. 안다고 여기는 것들이 지금은 모조리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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