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감기에 걸렸어
세 번의 약국과 두 번의 병원을 갔어
지금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가요. 네
약봉지를 들고 돌아오는 일요일 정오
눈알에 필터를 끼운 듯 꽃만 보였어
문을 열고 점심이라고 쓰여있는 봉지를
뜯어 털어 넣고 항생제를 뜯어 삼키고
짜 먹는 약도 뜯어 짜 먹었어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밀고
분리수거 쓰레기를 처리하러 나갔는데
거기도 꽃이 많았어, 언덕에 걸려
화보컷처럼 아까보다 더 그윽했고
주사도 맞았지만 아직은 기침할 때마다
몸이 들썩거렸어. 두 개의 구멍 중 하나에서는
하얀 세면대 위로 진붉은 색료를 쏟기도 했고
어제는 살아있는 시간이 온통 무거웠어
기절하고 싶었어 기절하지 못해서
눈을 감아도 빛이 쏟아져 신경을 가르고
고막을 향해 모든 소리가 송곳이 되어 찔렀어
지나가겠지 했던 시간은 내내 무관심했고
뇌가 질식하고 있어서 눈코입 온통 멍했어
지금 상황이 조금 억울한 게 있는 게
초반 3일에 방어했다고 여겼거든
4일째는 증상이 없었으니까
5일째에 무너뜨릴 줄 예상 못했지
평화는 언제든 깨지기 마련이지만
평화로운 적이 없었는데
살만하니까 이렇게 적지
부고 문자가 먼저 가는 줄 알았다
이런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온갖 텍스트를
다른 누군가도 드러내지 않고 있겠구나
해석의 시도와 이해하려는 사려 깊음이 없었다면
거리의 시체는 지금보다 더 즐비했겠지
어떤 이들은 기다리던 연락에 기뻐하고
누군가는 메시지를 차마 보내지 못하며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송이 맺혔던 앙상한 가지에
노랑 분홍꽃이 흐드러질 때까지
뜨거운 기침을 멈추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약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