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들, 불가항력의 이별들

미아 한센 러브 감독. 다가오는 것들

by 백승권

누군가의 교사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

하지만 자신의 자신은 아니었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에게 저 많은 것들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인기의 이유로 집필한 책과 함께 그녀가 신념을 가지고 담당했던 철학수업이 없어졌다. 수십 년을 같은 교사이자 동료,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같이 살았던 남편(앙드레 마르콩)은 자기가 바람이 났음을 고백했다. 이상적인 이성이기도 했던 아끼고 가깝게 지냈던 제자(로만 코린카)는 알고 보니 자신의 생각과 많이 다른 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자기 말고도 연인 사이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영영 철들 줄 모르는 엄마(에디뜨 스꼽)는 자신이 챙기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도 몰라 전전긍긍하며 지냈는데 불가항력으로 요양시설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둔다. 딸 또한 품 안의 자식이 아니었다. 남자가 있고 출산을 했다. 타박했지만 주변을 서성거리던 고양이 판도라도 멀리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렇게 수많은 상실이 한꺼번에 밀려올 수 있을까. 자신은 평생 누군가의 누구였는데, 주변의 존재들이 하나씩 자취를 감출 때마다 괜찮다고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눈물이 샘솟고 무너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의연하게, 지성에 대한 열렬한 추구와 철학에 대한 사랑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텍스트와 이론으로 점철된 이미 지나간 사람들의 관념적인 이야들로는 현실을 위로할 수 없었다. 엄마도 남편도 고양이 판도라까지 어느 하나 멀쩡하지 않았다. 나탈리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새롭게 불사를 장작을 찾아 헤맨 것도 아니다.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저항의 시절도 있었다. 세상과 부딪치고 기성세대를 부정하고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을 때가 나탈리의 삶에도 분명 있었다. 지금이 아닐 뿐. 지금의 나탈리는 그 시절의 나탈리와 같지 않았다. 그녀는 충돌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불편들을 원하지 않았다. 가족들과 이따금 놀러 가던 곳의 꽃들처럼, 자신이 오랜 시간 오롯이 가꿔놓은 것들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젠 대립과 반발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새 큰 변화를 바라지 않는 새로운 기성세대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애써 찾아 도달한 지점은 아니었지만 세월과 나이의 무게에 자연스레 순응한 것도 없지 않았다.

그녀는 지나간 것들에 대해 서글픔을 토로하기도 했다. 40대 여자들을 세상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의 지적 취향이 더 이상 새로운 세대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더 어린 여자와 새롭게 시작하는 남편을 우연히 목격하는 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엄마도 이젠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것들. 그리고 오롯이 홀로 남을, 기어이 다가오고 말 자기 자신도 그녀가 지금 겪고 있는 쓸쓸함에 기인했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은 나탈리의 성공적인 재기를 장황하게 묘사하며 후반을 극적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다가오는 것들의 효력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상황에 놓인 수많은 이들에게 다가오는 것들이지만, 다가오는 관계의 절멸과 다가오는 미친놈의 성추행과 다가오는 가족의 죽음과 다가오는 어두운 것들 사이에서 그녀는 철저히 개인이었고 나탈리로 맞섰으며 괴롭고 힘들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회복하거나 되돌리려 하지 않았고 개인의 한계에서 가능한 것들과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구분했다.


다가오는 것들은, 막을 수 없으니까.


최근처럼 여성 인권(을 위시한 인간의 기본권)이 수면 위로 솟아오른 적이 있었나 싶다. 나탈리는 투사로 상징화되지 않는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진에 평생을 바치기로 한 소시민의 일부이고 그녀가 겪는 것 중 신기하고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 씁쓸하게도 공공장소에서의 노골적인 성추행마저 그렇다. 프랑스는 물론 지금 여기에서도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 모욕적인 사건들이다. 영화는 나탈리가 담담하고 의연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크린의 히어로가 아닌 현실의 일원으로서 나탈리를 그린다. 그녀는 그 많은 이별을 동시다발적으로 겪었음에도 여전히 나탈리다. 자신과의 결혼생활을 배반한 남편이 밉고 판도라를 볼 때마다 떠난 엄마가 그리우며 조금 마음을 품었던 제자와의 좁힐 수 없는 거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럼에도 질척이는 갯벌에 발을 푹푹 빠져가며, 홀로 나아간다. 예상할 수 없는 생의 사건들은 앞으로도 수없이 다가오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묵묵히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의지를 지닌 뒷모습으로, 마르고 가냘프게 보이지만 쉽게 휩쓸리지 않을 강건함으로 식지 않는 눈빛과 놓지 않는 책들과 함께 홀로 나아간다. 다가오는 것들은 결국 다가올 것이고 나탈리는 그 사이에서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이다. 휘청일지언정 자신의 자신으로 남은 생을 증명할 것이다.



영화에 대한 불가항력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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