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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12. 2018

더 비싼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같이 가야 같이 사니까

아귀 암컷(위)과 수컷(아래)






영화는 숨기 좋은 글쓰기 소재다. 상황, 인물, 대사 등 기본적으로 허구를 뼈대로 제작되었다는 합의를 얻은 콘텐츠에 대한 후기는 보편적으로 이 글을 사실을 기반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착시를 준다. 반은 맞고 남은 반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가면이 되어준다. 그 뒤에 숨어 나와 오늘에 대한 진실을 적는다. 나는 알고 읽는 이들은 모른다는 안심 아래, 불쑥불쑥 진짜가 튀어나온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글을 쓰는 빈도가 점점 줄어든다. 빠르게 쓰이지만 같이 읽기에는 망설여지는 이야기. 누군가 나를 현실에서 알고 있고 이 글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런 믿음이 오해가 되어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글쓰기는 현실의 복제본이 될 수밖에 없고 복제 과정에서 원본과 괴리가 발생하며 그 괴리가 아무리 사소해 보이더라도 전부가 될 수도 있다. 그 차이 때문에 글을 쓰게 되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최소한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작동되는 뇌의 일부와는 다른 영역을 활용하여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뉴런을 추출해 파헤칠 수는 없지만 거의 확실할 것이다.


물리적 이동이 잦은 시즌이다. 이사를 앞두고 있다.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고 시세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현 거주공간의 변화가 필요했다. 도로시의 존재감이 집 자체의 존재명분을 뒤덮고 있었다. 우리의 도로시가 아닌 도로시의 우리가 되었고, 이 집 역시 도로시의 무대, 도로시의 세계, 도로시의 집이어야 했다. 현재의 진행상황은 이사 확정이다. 출퇴근 조건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현재 집과 미래 집이 초단위 도보 이동이 가능할 정도다. 조금 넓어졌다. 먹고 자고 놀 실내공간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팽창해가는 도로시의 영역이 넓어졌다. 날을 정했고 당일 계약을 앞두고 있고 그전에 인테리어나 처분할 것들을 정하는 중이다. 나는 외형과 크기가 암컷의 1/10이라는(끝내 작은 입으로 암컷을 앙 물고, 문 형태 그대로 암컷 신체의 일부분으로 합체되는) 아귀 같은 삶을 살고 있고, 아내는 인간의 신분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천국에서 내려와 내게 와줬다. 아내가 사준 집이나 마찬가지며 이번 이사 역시 아내의 오랜 연구와 지혜로움이 결합되어 도출된 환상적 결론이다. 첫사랑이자 아내가 되어준 이 사람의 곁에서 목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영영 지내고 싶다. 도로시의 창조주이자 내 새로운 인생의 설계자이다. 갑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사라는 초거대계획의 디렉터로써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요소를 감당했기 때문이다. 난, 무엇을 했는가. 언급하기엔 너무 사소한 것들만 담당했기에 아내를 신격화하고 칭송하는데 잠시 지면을 할애해 본다. 아내와 도로시 이야기는 글로 옮길 때마다 행복하지만 사실 이 글을 시작한 이유는 아니다. 난 아직도 이 글을 시작한 내막을 옮기지 않았다.


한 집에서 평생 사는 시대가 아니듯 한 지역에서 평생 거주하는 시대 역시 아니다. 방금은 돌려 말했다. 음, 다시 말하면 같은 출퇴근 거리를 평생 오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다시, 다시 말하면, 지금은, 현재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시기다. 현재의 일이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줄 수 있는 것들은 이상이 아니다. 보이고 만져지고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생성하는 것. 더 비싼 브랜드의 커피를 마시고 더 큰 판형과 고급 용지에 프린트된 사진집을 살 수 있는 여유, 고성능과 화려한 컬러를 겸비한 차를 고려할 수 있는 여유, 더 좋은 리조트, 더 나은 식사를 누릴 수 있는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여유, 도로시를 위한 더 많은 동화책과 공연, 옷과 간식을 사다 주거나 아내를 위해 더 좋은 옷과 액세서리, 화장품을 고르게 할 수 있는 여유, 은행과의 거래가 더 여유로워지는 여유,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더 넓힐 수 있는 여유, 미래의 여유, 현재 일의 가치는 미래의 여유와 직결된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지금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미래 어디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그 어디와 그 일이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 대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더 여유로운 가능성으로 이동하기 위해 내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이미 답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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