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남긴다
이곳에서
4년 6개월 10일 동안
카피를 썼다
도로시가 태어났고
세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단편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출간 기념 사인회를 했고
괌에 두 번, 제주에 세 번 갔다.
20세기 폭스
조르지오 아르마니
입생로랑
랑콤
힐튼
필립 모리스
삼성전자
르노삼성자동차
이케아
P&G
등의 브랜드를 담당했다.
1,2,3,4
네 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쳤다.
편차는 있겠지만 각자
내가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카피와 씨디(Creative Director) 사이의 안전거리를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결국 누군가는 다쳤고
이를 악물고 단절하기도 했다.
비즈니스적 결과물은 남았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어떤 영문인지
더 이상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탈되었을 때
그때부터
커리어의 꺾은선 그래프가
견고하고도 가파르게
치솟았다.
우쭐하기보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떠오른다.
이들에게 빚을 졌고
오래 두고 인사할 것이다.
선로를 벗어나도
일은 가능하고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살과 뼈에 새겨졌기에
쉽게 풍화되지 않을 것이다.
성장 여부를 스스로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일정 부분
확연한 변화를 겪었고
이 변화가 이곳을
완전하지 않아도
일할 가치를 주는 곳이라는
이미지로 만들어 줬다.
퇴사와 이직의 이유가
특정 인간들에 대한 사무친 증오와
영과 육을 파멸시키는 격무가 아님을
여기 적어 남긴다.
좋은 일도 많았으니까.
특히 외부적으로.
특히 우리의 도로시가
붉은 몸, 찡그린 얼굴,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났고
지금은 달리고 점프하고 다치고 울고 소리 지르며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 자라고 있다.
아내와 도로시가 있어
더 나은 카피를 쓰기 위해
몰입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은 나보다 커다란 나의 존재들이고
나보다 소중한 나의 전부, 나의 시간,
나의 과거와 현재의 이유이자 미래이자 결말이다.
매일 왕복 서너 시간을 오가며
다른 이들의 하루를 궁금해한 적도 많았다.
비와 추위, 어둠에 떨며
도로시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타는 곳을
하염없이 헤매던 경험에서
단편 소설 '버스는 오지 않는다'가
쓰이기도 했다.
신춘문예 수상이라니,
책장 높은 곳에서 덩그러니 놓인
상패를 보면서도 실감하지 못한다.
경력 중 가장 오랜 기간 다녔다.
내가 누렸던 기쁨과 즐거운 순간들이
함께 일하던 이들에게도
동시에 찾아왔었는지 묻고 싶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아끼고 좋아했던 동지들이
나보다 앞서 이곳을 떠났다.
모든 선택과 결정을 존중한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을 뿐이다.
내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