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프롤로그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직원이 숙소의 문가에 서서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넋을 놓고 창밖을 보던 내가 몸을 천천히 돌리는 것이, 마치 제삼자의 눈으로 보고 있듯이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몸을 돌리지. 이 몸은 아직 나의 것이고, 나는 그걸 의식한 상태로 세상을 떠날 거야.
“좋아요. 날이 너무나 아름답군요.”
“그렇죠? 요즘은 정말 날씨가 좋아요. 산책을 다녀오시겠어요?”
“좋죠.”
“동행해 드릴게요. 준비가 되면 말해주세요.”
“그럴게요.” 나는 감사의 표시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건 기억하시죠?” 직원은 목소리의 톤을 바꾸지 않은 채, 그러나 확연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물었다.
“네. 아직 제 정신은 제 육체를 떠나지 않았어요.” 내가 웃어 보였다. 그러나 직원은 내 웃음을 웃음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원하시면 시간을 더 드릴 수 있어요. 들어오실 때 이미 말씀드렸듯이 선생님은 아직 병이 위중하지 않으시고 이 날씨를 조금 더 즐기실 수 있으니까요. 고집을 피우셔서 가장 빠른 날을 잡았지만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뀌셨다면 더 긴 시간 여기서 머물 수 있답니다.”
“알아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조금이라도 더 제 자신인 상태로 저 자신을 종료시키고 싶어요. 떠밀려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왔는걸요. 다만…”
“다만?”
“혹시 신부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직원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아시겠지만 가톨릭은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맞아요. 제가 죄송해요.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요.”
“괜찮아요. 많은 분들이 종교적인 서비스 부분을 물어보시죠. 하지만 아쉽게도 종교적 서비스는 제공해 드릴 수가 없답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을까요?”
“저녁에 화이트와인 한 잔 곁들이고 싶군요.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최고의 와인을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직원이 그제야 활짝 웃어 보였다.
직원은 내 상태를 너무 좋게만 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나 자신의 일부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축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것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숲을 산책하고 싶었지만 직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섬망으로 인한 혼란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실족하여 죽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운 사망일 텐데.’ 혼자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생각을 하시나 봐요?” 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음으로 답했다.
“신부님을 찾으셨죠?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냥… 죽기 전에 죄를 고하고 싶었어요.”
“아, 그렇군요.”
“사실은 많은 기억이 이미 희미해졌어요. 가끔은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헷갈리고.”
직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큰 미련이 없어요. 살 만큼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하나 두려운 생각이 들었는데, 그 두려움이 한 번 마음에 생겨난 후로 계속 커져가고 있어요.”
“그게 무엇이죠?”
“제가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는데 그게 죄인지도 모르고,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고,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너무 평안하게 떠나는 것이요.”
“그게 두려우신가요?”
“네, 저는 그게 두려워요. 이상하죠? 막상 기억이 온전할 때는 제 죄를 곱씹어볼 생각도 못 하고 살았어요. 이제 와서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직원은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았다.
“선생님은 좋은 분이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행하셨던 선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럴까요? 그건 또 억울하네요.” 나는 직원과 함께 웃었다.
“아, 억울한 게 하나 또 있기는 해요.” 약간 앞서 걷던 직원이 궁금하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뒤돌아 봤다.
“그게 뭘까요?”
“커피를 좀 더 마시고 가면 좋을 텐데!”
“선생님은 정말 커피를 좋아하시죠. 저도 정말 좋아해요.” 직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죽음 뒤에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의 농담에 직원이 다시 한번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꼭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기왕이면 근사한 카페에서 마실 거예요. 이렇게 멋진 산책길 끝에 만날 수 있는 근사한 카페에서 말이 잘 통하는 오랜 친구와 커피 한 잔 하는 것, 그게 사는 즐거움이죠.”
“그럼요, 선생님.”
“제 마지막 시간에 친구가 되어줘서 감사했어요.” 나의 말에 직원이 다시 한번 내 손을 잡았다.
“그게 제 일인걸요.” 그 말은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직원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만찬에 곁들인 와인은 과연 직원이 큰소리 칠 만했다. 이런 맛을 기억하고 죽을 수 있다니 제법 축복받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 밤이로군. 나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배 위에 얹은 상태로 가만히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저지르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죄가 정말 없을까? 지난 며칠간 나를 괴롭혔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는데…! 갑자기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갑작스럽게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회한이 온 육신과 정신을 휘감았다. 나는 내용도 알 수 없는 죄를 고백하며 침대에 눈물을 쏟았다.
“그래?” 누군가 내게 반문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대충 인간의 형상 같기도 한 어떤 존재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누구세요?”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나? 네 소원을 들어줄 전능한 존재시지!” 알 수 없는 그것이 뻐기듯 대답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뻐기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느껴졌다.
“제 소원이요?”
“그래, 네 소원.”
“제 소원이 뭔데요?”
“내내 본인이 말해놓고 나한테 물어보는 건 또 뭐야?” 그것이 한숨을 쉬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긴 뭐야, 죗값을 치르는 거지.”
“그걸 어떻게… 이루신다는 거죠?”
그것이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이루어졌어.”
“어떻게요?”
“네 온 생애를 통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