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안개 속에 서있다. 얼마나 서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어디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잡고 있던 누군가의 손을 놓친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짙은 안개에 몸을 맡기듯 서있으려니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드디어 안개가 걷히려나 생각했지만 안개가 물러난 곳에 새로운 안개가 들어왔다. 안개 속에 서있는 것이 나 자신인지조차 모호해질 무렵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침대, 낯선 느낌. 낯선 느낌의 정체는 공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낯선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것이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왔다. 현관 밑 틈 사이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눈 앞에 서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공포가 크면 소리가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한다. 소리를 질렀지만 목구멍에 걸려 삐걱거렸다. 나는 뒤늦게서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많이 놀랐지?” 그것이 내게 물었다. 평범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들어오는 게 더 효율적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효율이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물었다.
생각해봐. 그것이 현란한 손짓과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현관에서 벨을 눌러. 네가 화면을 통해 나를 보고 누구세요? 물어보고 내가 대답해. 그런 방식으로 내가 이 집에 들어올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과정을 겪은 후에도 나는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어. 그러니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들어오는 게 효율적이라는 거야.”
그것의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어이없게도 마음이 약간 놓였다.
“그래서… 누구세요?”
“나는 원한을 풀어주는 고마운 존재야.” 그것이 자랑하듯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대답했다.
누구신데 원한을 풀어주느냐고 재차 묻자 그것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었다.
“이 대화가 얼마나 효율적이지 않은지 봐. 나는 이런 대화를 좋아하지 않아. 우선 너는 나라는 존재의 정체에 대해 묻고 있지. 너는 너 자신의 한계가 분명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서 나를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존재야. 왜 원한을 풀어주는 지 묻는다면 난 아주 장황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이 성사되기 전에 그런 얘기부터 하는 것은 역시 효율적이지 않아. 모두 이해가 돼?”
설명을 듣다보니 또 한 번 마음을 놓이는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그것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와 무슨 계약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누구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건 그의 관점에서는 효율적이지 않은 질문이라서 대답해줄 리 없다.
“원한을 어떻게 풀어주시는데요?” 나는 고민 끝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지만 딱 한 명만 대상으로 해.”
“두 명 이상은 안 돼요?”
“어느 누군가는 지구상 모든 존재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수 있잖아? 그런 자를 만나면 그냥 그를 제외한 모두를 죽이게 되는 수도 있어. 그게 너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안 돼? 불쑥 말이 나오려는 걸 참고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못할 것은 없지만 그건 너무 과격해. 나는 그런 건 싫어. 뭐든 과정이 중요하거든. 특히 원한을 풀어주는 일은 더더욱 그래. 불특정다수에 대한 원한은 받아들이지 않아. 두 명 정도는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상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좁혀놔야 진짜 원한이 깊은 대상을 추려낼 수 있는 법이거든.”
그것은 매번 꽤나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을 두고 내용을 생각해 보면 그저 대충 상황에 맞게 지어내는 이야기 같기도 했다.
“…지금 당장 말하면 되나요?”
“아니, 아니야. 조건이 있어. 일주일간 나를 재워주고 먹여줘야 해.”
세상에. 나는 놀라서 살짝 뒷걸음질쳤다.
“왜 싫어?”
“네. 당연하죠. 당신이 누구인줄 알고…”
“내가 아주 전능한 존재라는 것은 알겠지?”
“아뇨 아직.” 일주일간의 동거라는 조건은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닫혀있는 문을 통과하는 걸 눈으로 봐놓고서도?”
“그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닫힌 문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좋아. 그래서 나더러 나가라는 거야? 나가라면 나갈게.” 그것의 무심한 대답을 듣자 마음 속 무언가가 뒤흔들렸다.
“잠깐만요. 잠시 생각좀 해볼게요.” 나는 다급히 말했다.
“생각?”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흔하게 오지 않는 기회.”
“오, 잘 아네. 이제서야 말이 통하는 것 같고. 난 좀 앉아있을게.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둘 지 알 수가 없으니,원.” 그것이 툴툴대며 테이블의 의자를 빼서 털썩 앉았다.
그것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꿈일 확률은? 없지 않다. 그렇다면 언젠가 깰 테고, 그렇다면 큰 문제가 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생생한 지각몽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대충 인간의 형태를 지녔지만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 같아 얼굴이라는 것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데도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몹시 고귀하고 어찌 보면 너무 못생겨서 얼굴을 찌푸리게 될 정도였다. 길고 마른 몸에 옷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벗은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옷과 몸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옷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 다른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나 커피좀 줘.” 그것이 말했다. 나는 그것이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커피를 추출해서 건넸다.
커피를 마시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그저 내 존재가 궁금할 뿐이구나. 그것이 딱하다는 듯 말했다.
“왜 제 원한을 들어주겠다는 거에요?”
“딱히 너라서 찾아온 게 아니야. 들어오기 전까지 누가 있는 줄도 몰랐어. 그냥 아무 데나 온 거라고.”
“그런 식으로 만난 사람에게 갚을 원한이 없다면요?”
“없지 않지. 아주 드물게 있더군. 하지만 대부분, 심지어 명이 이틀 정도밖에 안 남은 노인들도 원한이 있어서 소원을 빌더라고.”
“그런 사람은 일주일간 재워주고 먹여줄 수가 없지 않나요?”
“그런 경우는 그냥 소원을 들어줘. 물론 들어보고 타당한 경우에만 말이지. 일주일의 기한은 내가 좋아서 정한 건 아니야. 인간의 기준에서 그 정도가 적당해서지.”
그래요? 그것의 소위 논리적 기준이라는 것이 대충 주먹구구식으로 정한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렸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대충 적당한 원한의 대상을 고르더라고. 그래서 일주일인거야. 내가 먹고 놀고 싶은 기간이 아니라고.” 그것이 내 반응에 이상하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아하.”
“아하? 그건 무슨 반응이야?”
“드디어 내게도 이런 기회가 왔다는 기쁨, 기대감, 설렘, 그런 것을 표현하는 감탄사이지요.” 내 대답에 그것이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상체를 내쪽으로 기울였다.
“좋아. 너라는 인간이 그간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네가 하고 싶어하는 복수에 대한 얘기를 좀 들어볼까?”
“외람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먼저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도 될까요? 딱히 의심해서라기보다는 저도 약간의 검증이 필요하잖아요. 기분이 나쁘셨으면 죄송하지만.”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것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흠. 충분히 이해해. 네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기분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나요?”
말이라고 해? 그것이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그것의 몸이 공중에 잠깐 떠서 머물렀다. 2초? 3초?
“무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감히 내게 별 짓을 다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미친 작자들도 많고.”
“그래도 원한을 갚아주나요?”
“그럴 리가. 내가 그런 것들의 원한까지 갚아줄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그럼 어떻게 하나요, 그런 무례한 인간들에게는?”
“기절을 시켜서 스스로 꿈을 꾼 것이라고 믿게 만들어 버리지.”
그뿐인 줄 알아? 그것이 말을 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대상을 정하지 못하더니 갑자기 먹고 재워줬으니 금품을 달라고 하는 인간들도 있었어.”
그것은 그런 인간들 또한 기절시킨다고 했다.
“경찰을 부르거나 한 사람은 없었어요?”
“왜 없겠어, 응? 하지만 경찰 따위 불러봤자 난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제일 바보 같은 짓이 뭐였게?” 뭐였는지 물어달라는 것 같아서 물어봤다.
“내 동영상을 몰래 찍어서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려고 하는 놈들이야. 그런 놈들이 정말 많아. 하지만 방금도 얘기했듯이 나는 그런 영상으로 찍히지 않거든. 대체 전능한 존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원.”
그것에게 진심으로 동조하며 맞장구를 치자 그것이 나를 흘끔 보더니 말했다.
“너처럼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대하는 것은 흔치 않아서 사실 좀 불안해. 뭘 찍거나 하는 바보 같지는 않은데.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드디어 온 기회, 이런 것 말고, 나의 존재를 말이다.”
“그건 애초에 효율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지.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표현하는 것은 전혀 상관 없어. 그러니 편하게 말해보렴. 내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얘기를 하면 제 다음 질문에도 답해주시나요?”
“그러지.”
“저는 선생님이.. 그러니까 제 앞에 앉아계신 분이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암흑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암흑물질은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암흑물질의 세계의 지적인 존재가 차원이 다른 기술로 우리 물질 세계의 존재들에게 인지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그런 것 아닐까요?”
“그것 참 흥미롭네.” 그것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혹시..맞나요?”
“아니야. 또 다른 해석은 없어?”
“다른 해석이라. 다른 해석으로는, 이건 좀 구태의연한 해석인데,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원한이 만들어낸, 말하자면 원한의 집약체랄까요, 그런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쪽의 가능성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 그래.. 그것이 고개를 살짝 흔들며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이해심이 많은 인간이여, 이제 질문을 해봐.”
“…왜 이 일을 하시나요?”
“일? 일이라고?”
“네. 인간의 원한을 대신 갚아주는 일이요.”
“난 이게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겨우 인간을 위해 일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 거야?”
그것이 몹시 분하다는 듯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내게 일종의 놀이야. 지루함을 달래주는 놀이.”
“…왜 이런 놀이를 즐기기 시작하셨어요?”
“얘기하자면 길 수도 있는데.”
“좋죠.”
7년 전, 그것은 우연히 길에서 만난 어떤 술취한 전직 은행원의 억울한 얘기를 들어주게 되었다. 은행원은 그가 다니는 은행의 지점장에게 충성을 다 했고 제법 성과를 내며 지점장의 승승장구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원은 지점의 동료가 고객의 돈을 빼돌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행원은 고민 끝에 그 사실을 지점장에게 알렸다. 지점장은 알겠다고 하더니 은행원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회사에서 쫓아내 버렸다.
아니, 그런 나쁜 놈이 있다니! 나는 탄식했다.
“그렇지. 알고보니 횡령하던 놈과 지점장은 한 패였던 거야. 그걸 들키게 되니 이 사람에게 다 뒤집어 씌우고 손을 턴거지. 은행원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도 잃고 횡령범이라는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었어. 재산은 모두 압류 당했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어. 건강했던 노모는 이 일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버렸지. 듣던 나도 화가 났기 때문에 그에게 속삭였어. 내가 복수를 해줄 수 있다고. 술에 취해 반쯤 감겨있던 그의 눈이 번쩍 뜨이더군.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지점장이라는 놈과 공범이었던 동료를 잡아다가 억울한 은행원의 앞에 데려다 놓았어.”
갑자기 으슥한 산속으로 끌려오게 된 두 사람은 무슨 일인지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은행원을 알아본 후에는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살려만 주면 뭐든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은행원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그들이 발버둥을 칠수록 그들의 다리가 점점더 오그라들듯이 굽어졌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울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들을 보며 서 있던 은행원은 둘 중 더 철저하게 용서를 비는 놈을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동료였던 놈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어. 그곳은 으슥한 산기슭이었는데 그놈이 머리를 바닥에 두들기는 소리에 산짐승들이 모두 잠을 깰 정도였지. 그런데 갑자기 그 옆에서 지점장이라는 놈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파는거야. 무슨 짓인가 했더니 바닥을 파서 그 안에 들어가더니 납작하게 조아리더군. 자신이 더 낮은 위치에서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였나봐. 그걸 본 공범이 질 수 없다는 듯 땅을 파기 시작했어. 둘은 미친 듯이 땅을 파고,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또파고 또 엎드리고를 수없이 반복했어. 그걸 그 은행원은 그냥 무표정하게 보고 있더라고.
얼마가 지나자 그놈 둘은 이제 지면 밑으로 완전히 파고 들어가서 엎드려있었어.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이야. 앉아서 보고 있던 은행원이 일어나더니 내게 말하더군. 이제 둘 다 묻어버리라고. 둘은, 특히 지점장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한 명은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은행원이 말했지. 우리 사이에 신뢰라는 게 있었습니까? 나를 믿었어요? 내가 당신을 믿은 만큼? 그렇다면 이제 공평해졌네요. 그리고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가버렸어.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들이 파놓은 흙을 원상복구해서 그들을 묻은 다음 커다랗고 편편한 바위로 그 위를 눌렀어. 그들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은행원에게 찾아갔지.”
“그가 고맙다고 하던가요?”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어. 은행원은 멀지 않은 곳에 목을 매달아 죽어있었어.” 그것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덧붙였다. “그가 죽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
잠시의 침묵을 깨고 그것이 말했다. 커피 한 잔 더 있어? 빠르게 커피를 준비해서 그것에게 건넸다. 그것이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미치도록 궁금한데 물어볼 대상이 없어져 버린 거지. 그는 왜 죽은걸까? 너는 알겠어? 그가 왜 죽었는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 은행원은 내가 ‘오랜만에’ 직접 대면해본 인간이야. 그가 그렇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인간의 복수심에 관심을 갖게 됐지.”
“그래서 그 후로 이런 일..이 아니라, 놀이를 하게 되셨다는 건가요?”
“글쎄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두 명에게 복수를 해주셨네요?” 나는 집요하게 상기시켰다.
“한 번에 한 명이라는 기준은 이후에 만든 기준이야.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더라고. 자신을 포함해서 인류 모두를 죽여달라는 이도 있었어. 환경에 대한 복수라나.”
“그건 말 되네요.”
“그렇게 다 죽여버리면 그 다음에는 내가 뭘 하고 노냐고.” 그것이 궁색하게 말했다.
“일주일 간 먹이고 재워주는 기준도 하다보니 생긴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그리고 의외로 그 기준을 다 채워서 복수에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아. 아까도 말했지만 일주일이 끝나기 전이든 끝난 후든 기절로 끝난 놈들이 더 많거든. 나 나름 정당한 복수를 할 인간을 걸러내는 기준이 된 셈이지.” 그건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변이 됐어? 그것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얼굴을 살폈다.
“대충 된 것 같아요. 더 질문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더 물어봐. 말하기 시작하니까 나도좀 재미있는걸.”
그것이 입을 가로로 길게 찢으며 히죽거렸다.
어느 새 시간은 자정을 한참 지나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와 쉬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대에 차서 나를 보고 있는 그것에게 이제 그만 자야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질문을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있나요? 말하자면 가장 인상적인 복수?”
“좋은 질문이야. 하지만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해. 범주를 좀 나누자면, 인간은 꼭 자신의 원한을 갚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야. 타인의 원한을 갚기를 바라는 사람이 꽤 많았어. 거기서도 또 나누자면 자신이 아닌 인간의 원한, 그 중에서도 자신이 알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의 원한이나 아예 모르는 어떤 사람의 원한. 그 뿐만 아니야. 동물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자도 많았지. 그 각각의 범주에서 하나씩 다 말해줄 수도 있어.”
“다 듣고 싶기는 한데 밤이 너무 깊었어요.” 나는 결국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다. 거실의 시계가 세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 내가 깨워줘?”
“아니요.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깨워줄 필요도 없어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으니 천천히 들어도 될까요?”
그것은 다행히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 어디서 주무실래요? 저쪽에 소파가 있는데 좀 작아서.” 그것도 잠을 자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 그런 걱정은 하지말라고. 난 앉아서도 잘 수 있고, 저 정도의 소파면 아주 편하게 잘 수 있어.”
그것은 소파로 가서 소파와 한 몸처럼 납작하게 몸을 눕혔다. 눕혔다기보다 그것은 소파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쪼그라들었다. 계속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소파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했다.
그럼 잘 자. 소파가 된 그것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소파를 향해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