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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cea Mar 26. 2021

나는 아직 현대 예술이 어렵다

#1

 대학교 신입생 시절, '철학의 이해'와 '역사의 이해' 등 각종 '~의 이해'로 끝나는 이름의 교양과목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나는 호기롭게도 '현대미술의 이해'라는 생에 가장 큰 실수를 하게 됐다.


 당시 '현대미술의 이해' 수업은 10명 남짓한 학생들과 상당히 점잖으셨던 교수님으로 진행되었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미술의 발전이 현대에 이르러 어떠한 변화를 맞이했는가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미리 준비해오신 PPT를 기반으로 수업에 꽤나 충실하셨지만, 학생들 대부분은 졸린 눈을 비벼가며 겨우 고개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중간에 수업을 포기하기엔 대학생활의 첫 단추를 잘못 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도 꾹 참고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느덧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시험이 끝난 후에 미술관을 함께 가자고 제안하셨다. 지루한 수업보다는 바깥바람을 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학생들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방문했는데, 지금까지 이론으로만 미술을 배워왔던 내겐 생에 첫 미술관 방문이었다. (물론, 초등학생 시절 미술관 견학을 가긴 했지만 친구들과 뛰어다니다가 선생님께 혼난 기억밖에 없다.)


평일임에도 미술관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큐레이터분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현대 미술작품들, 그 작품들의 가치는 상상을 뛰어넘었지만 내 눈에는 그 가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만들다가 만 것 같은 작품'

'인간의 손과 발을 기괴한 형태로 이어 붙여 놓은 작품'

'도무지 무얼 표현하려 했는지 알 수가 없었던 여러 선들의 움직임'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작품들에 열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얼굴이 화끈해졌다. 마치, 내가 가치 있는 예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교양 없고 무식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씩 큐레이터의 해설을 듣고는 작품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괜히 고개를 끄덕여보긴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 작품들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마지못해 그들의 감탄에 동조하고 있는 사실까지도.


#2

 얼마 전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근래 여러 매체에 자주 노출되어 얼굴과 이름이 낯익은 한 젊은 시인의 시집이었다. 언제나처럼 표제시를 찾아 읽었다.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 누구에게도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억지로 감춰둔 진실을 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한 줄 한 줄 읽는 내내 그 지치고 힘들었을 마음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시들은 어떨까 생각하며 그 뒷장에 있는 시를 읽었다. 시인의 감정은 날것 그대로의 형태로 살아있었다. 지쳐서 쓰러진 사람이 살기 위해 겨우 내쉬는 짧고 옅은 호흡을 닮은 시였다. 감정의 축약 없이 시어 하나하나는 생생했고, 나는 시를 읽으며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그녀의 감정을 마주했다. 길을 걷다가 사이가 어색한 사람을 마주치듯 꽤나 불편한 마음이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나는 그 시집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그대로 서점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캔커피를 하나 사서 편의점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찾아 읽으니 마음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3

 시는 잘못이 없다. 시인에게도 잘못이 없다. 분명,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다. 그건 단순히 내 취향의 문제였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시어에 투영시키는 그녀의 시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 건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요즘엔 그런 시들이 많은 것을 안다. 그런 표현이 요즘 글의 트렌드라는 것도 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고 열광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도 그런 시를 쓰고 인기를 얻을 수는 없을까 고민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런 시를 쓸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애초에 기대를 접었다. 그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요즘 나오는 노래보다 옛 노래들이 훨씬 많고, 노트에 적힌 시들 또한 시인의 감정과 생각이 어느 정도 정갈히 표현된 시들이 많다. 문학이던 미술이던 음악이던 모든 예술분야에서 비슷한 양상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질문들이 주된 콘텐츠가 되고, 그 표현 방식은 정갈한 형태보다는 조금 더 날것의 형태로 변해간다. 심미학적인 관점의 변화도 있을 것이고 그러한 콘텐츠와 표현 방식의 대중성이 증대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변화가 썩 내키지 않는다. 아니, 내키지 않는다는 것보다 그 이전의 것들에 애착이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듯싶다. 익숙한 것들이기에 더 편하게 다가오는 것뿐이니까. 


 시대의 변화를 두 팔 벌려 맞이하지 못하는 내가 아쉬운 것도 있다. 시대의 변화라는 흐름에 편승해 나도 무언가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돌아다니는 꼴이 되겠지 싶어 그 생각을 접는다. 

 

 나는 아티스트와 작품 사이에 어느 정도 감정의 거리감이 있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그 시인의 시를 보고 마음이 불편했던 것과 현대 미술작품들을 보고 거북함을 느꼈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렇다. 아티스트의 감정이, 특히 그 감정이 내 손으로 어루만지기 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그 고통스러운 마음이 살아있는 그대로 내게 전달되는 순간 나는 그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예술을 편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모든 변화의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가 작다는 걸 알고 있다. 아직은 그 날것의 표현들이 내가 감당하기에 퍽 벅차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맛을 보며 익숙해질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공감되지 않는 대중의 감탄에 묻어가며 같이 박수를 치는 것보다, 예술의 표면적 가치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나의 감상과 이해만으로도 온전히 그 내재적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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