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나오게 된 정확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학급 아이들 중 하나가 학급 단톡에 대고 좀 사차원스러운 말을 했을 뿐이다.
'지구가 흔들흔들 흔들려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지러워. 그래서 멀미에 걸릴지도 몰라.'
이런 말이었나. 거기에 대고 한 아이가 재빠르게 답을 단다.
'너 그거 중2병 ㅇㅇ'
우스운 건 그 말을 하는 아이도 듣는 아이도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중2병이라고 한 아이는 놀려줄 양으로 그런 말을 했겠지만, 초등학교 6학년에게 '중2병'이란 칭찬일까 욕일까.
6학년 국어 1단원 40쪽에는 <구멍 난 벼루>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수업 준비 때문에 꾸역꾸역 읽으면서도 시대에 뒤쳐진 흥미 떨어진 글감에 대해 투덜거렸었던 기억이 있다. 허련이라는 사람이 추사 김정희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애를 쓰고, 마침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세상 그 어떤 6학년 애들이 '그림에 마음을 담는' 법을 재미있어하겠냔 말이다. 그런데 마침내 48쪽, 마지막 쪽에 이르렀을 때였다.
"허련은 자기가 쓴 기법이 초묵법인 걸 몰랐네요."
"천재네요."
각고의 인내 끝에 추사 선생의 인정을 받고, 마침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터득한 허련이 물기 없이 마른 붓을 써서 건조한 나무껍질을 표현한다. 허련 선생이 싱긋 웃으며 그게 바로 초묵법이라고 한다.
"손 가는대로 미용을 했을 뿐인데 그게 바로 히피펌이었던 거지."
아이들이 세상 더없이 진지하길래 좀 놀란 채로 엉뚱한 예를 들어줬다. 웃자고 하는 농담이었다.
"무아지경으로 컴퓨터를 만졌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코딩이었다."
크면 뭐가 될지 정말 궁금한-말 그대로, 비꼼 없이 긍정적인 의미로-아이 하나가 내 말을 받았다. 애들이 킥킥거리며 자기 방송분량을 차지하기 위해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각종 요상한 비유가 난무했다. 가르치는 걸 매일매일 숨쉬는 것처럼 되풀이하다보면 가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온갖 정성을 들이고 요즘 아이들 입맛을 고려한 오색 찬란한 수업 자료에는 맥빠지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허겁지겁 공책에 얼개만 짜가지고 애드리브 80%로 때운 수업은 예능 보듯 열광한다. 물론 이런 행운이 늘 뒤따라주는 건 아니다. 내가 맡은 6학년 아이들처럼 괜찮은, 가끔 성질을 부릴지언정 틀린 것은 흔쾌히 인정하고, 마음이 동하면 엄청난 학습욕을 보여주는 아이들을 맡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중2병'에 걸린다면 그게 꼭 나쁜 일일까. 어른의 기준과 가르침을 벗어나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면. 그런데 그 모습이 배웠던 것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그걸 가르쳐준 어른들조차 나을 것 하나 없는,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모자란 걸 깨닫는다면, 그래서 자기 감정과 세상의 불공평함을 한껏 격렬하고 오그라드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면?
배우지 않고도 '초묵법'을 찾아낸 아이들이 자신이 알아낸 것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나이 많은 인생 선배들은 말한다. 그건 제대로 된 '초묵법'이 아니라고. 네 솜씨는 너무 설익고 오그라든다고. 자신들이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알아낸, 제대로 된 '초묵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만 그들이 시범보이는 '초묵법'은 정답이 아니며, 그 스스로도 아직 익혀야 할 것이 많음을 모른다. 그 미숙함을 꾸짖기보다 칭찬을 먼저 해야 함을 모른다.
가끔 수업에서 나는 "Latte is horse."를 구사한다. 50%의 경우는 장난으로, 나머지 50% 정도는 평가하고 가르치고 뜯어고치고 싶어하는 내 '어른스러움' 때문에. 전자를 구사할 때 아이들은 깔깔 웃고 '선생님은 비타민 먹어도 키 안 커서 어떡해요.'라고 말한다. 후자를 구사할 때 아이들은 동태 눈이 된다. 안 들어도 괜찮다. 어차피 아이들에게 나도 하나의 학습 자료일 뿐이고, 그걸로 무엇을 배울지는 오롯이 그 아이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