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의 조앤롤링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영국식 기숙학교에 다니는 마법사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도, 기숙학교도 조앤 롤링의 머릿속에서 처음 만들어신 건 아니지 않은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판타지 소설이 있었다. 귀족 아이들이 '블루벨 파티'에서 노는 내용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그 '블루벨'이 실제로 벨기에에서 자라는 꽃 이름이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창작물은 모두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딛고 있다.
그래서 간단히 목표를 말하자면, '표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수업을 생각했다. 창의성이란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었던 것을 새롭게 조합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순서는 대략 이렇다.
(0) 내가 아는 창작물 떠올리기
(1) 세상에 존재하는 아주 흔한 소재 떠올리기
(2) 비현실적인 소재 떠올리기
(3) (A)+(B) : 두 가지를 조합하여 새로운 설정 만들어내기. 그 설정을 바탕으로 주인공이 어떤 일을 겪을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기
"부산행이요." "해리포터요." "어벤져스요" "샹치요."
(0)번에서부터 슬슬 어긋나기 시작한다. 일단 애들이 흥분했다. 여기저기서 지방방송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자기들이 빠져 있는 걸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덕후에게 짜릿하고 재미난 순간인가 말이다.
"살인교실이요."
"하이큐요."
애 하나가 킥킥거리며 손을 들고 말한다.
"하이큐 재밌지."
"어.. 선생님이 왜 알지.."
"귀칼이요."
우리 반에서 반골 기질이 충만한 아이가 고개를 쳐들고 말한다. 옆에 있는 애들이 키득키득거린다. 나는 걔한테 '일본의 우익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왜곡된 역사 의식'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아야 할지 0.1초간 고민했다.
"응, 귀멸의 칼날도 인기 많지."
분명 재미있어 하긴 하는데 아까부터 어수선했던 수업 분위기가 점점 심해진다. 해리포터의 예를 들며 창작 작품이 사실은 원래 존재했던 요소임을 설명하는데 아이들은 이미 집중력이 바닥을 쳤다. 내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을 꺼내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런가. 좀만 기다리면 알아서 말할 수 있는 시간 줄 건데. 아이들의 모둠 토의는 마스크를 쓴 채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시작된다. 최대한 떨어뜨려 앉혔지만, 그리고 각자 주어진 태블릿에 고개를 박고 얘기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토의를 시킬 때마다 간이 쪼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먼저 현실적인 소재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 비현실적인 소재를 이야기해보고 돌아가면서 그 소재들을 합친 새로운 설정들을 이야기한다. 아깐 그렇게 어수선하더니만 지금은 열정이 흘러넘치다못해 떠내려갈 지경이다. 아까 초반부는 실패한 수업의 전형적인 도입부인데, 이제는 나름대로 또 잘 흘러가는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설정들이 쏟아져나온다.
날아다니는 신발, 초능력을 쓰는 핸드폰, 자각몽을 꾸는 방법을 아는 초등학생, 좀비 학교, 돈 많은 좀비, 뱀파이어 유치원, 뱀파이어 학교, '사회주의자'가 차원이동을 해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는 이야기(이 의견을 낸 학생은 북한이나 사회주의적 가치관과 관련된 특별한 신념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마도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북한과 관련된 유머 등등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이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사상적으로 민감한 건 안 가르친다. )
그런데 뭔가 맘에 안 든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생각해보니 굉장히 익숙하다. 다시 말해 좀 식상하다. 이 모든 설정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 웹툰, 웹소설, 드라마, 영화 등등.... 이렇게도 저렇게도 우려먹었는데 아직까지 우려먹을 게 남았나 싶은 사골 국물 같은 소재들이다. 내가 원했던 결과가 이게 아니었나. 아이들이 그래도 유행하는 소재들을 줄줄 뽑아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안달나게 만든 걸로 만족해야 하나.
그러다 깨달았다. 첫째로, 나는 정확한 학습목표를 세워놓지 않았구나. 그게 정말 씻을 수 없는 잘못도 아니고, 학습목표 안 세운다고 배움이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수업 결과를 보고 이게 잘 된 수업인지 아닌지가 아리까리해진다.
그리고 둘째로, 애들이 생각해 내는 소재들이 식상한 이유는 그 애들이 보고 즐기고 지금까지 경험했던 소재들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 식상함이 꼭 나쁘지는 않다. 익숙함을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는 소비자들도 많고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오만 가지의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약간의 참신함은, 소재가 주는 정말 약간의 참신함은 어떤 작품을 그저 그런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소재 조사를 병행하라고 할 걸... 태블릿 pc는 뒀다 뭐하니...
실패의 쓴맛을 곱씹으며, 아이들에게 "생각해낸 소재를 가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내용이 될지 발상을 3줄로 쓰라"는 숙제를 내 주었다. 빨리 집에 보내고 싶은데 아이들이 손을 든다.
"꼭 저번에 생각했던 소재들을 가지고 써야 돼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얼마든지 원하는 걸 찾고 새로운 내용을 써도 된다고 했다. 그러니 다른 아이가 손을 든다.
"꼭 세 줄만 써야 돼요? 그냥 이야기를 다 쓰면 안 돼요?"
이건 뭐라고 대답해줘야 되냐. 아유 훌륭하구나.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한번 해보고, 막히면 쓸 수 있는 만큼만 쓰렴. 이제 또 다른 아이가 손을 든다.
"선생님, 꼭 A+B로만 두 개를 합쳐야 하는 거 아니죠? A+A만 해도 신기한 게 되고, A애 B 세 개를 더해도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