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7일자 수업(6학년 아이들, 작가 될 수 있을까..)
우리 반에는 똑똑한 친구가 한 명 있다. 똑똑한데 본인이 똑똑한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겸손의 미덕은 다소 떨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담백해서 미워하기는 힘든 아이. 관용어에 대한 수업을 하며 '익는 벼가 고개를 숙인다.'에 대한 예를 들자 이의를 제기할 줄도 안다.
"그렇게 겸손하게 얘기하는 거 듣고 실제로 진짜 못하는 줄 알면 어떡하는데요?"
아, 그게 또 일리가 있는 말이라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하긴 자기 장점을 이야기하면 잘난 척, 겸손하면 별볼 일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맞는 가르침인가 싶긴 하다. 그 아이의 꿈은 작가다. 엄밀히 말해 본캐로서의 꿈은 따로 있고 부캐로서의 꿈이 작가다. 대면수업으로 할 계획이었던 글쓰기 수업을 결국 줌으로 하게 됐는데, 가장 호응이 좋은 것도 우리 안 미운 미운이다.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자신의 기가 막힌 글솜씨를 보여주겠다며 신이 나 있었다. 얼마나 잘 쓰나 보자 아주.
1) 자신이 만든 설정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지을지 얼개 짜기
(패들렛 사용, 각 학생의 탭에 자신의 이야기 간단히 적고 다른 친구의 이야기에 댓글 달아주기)
2) 모둠별로 초반의 이야기 설정을 하나씩 골라 릴레이 글쓰기 하기
정말 상상 이상으로 아이들이 1번을 잘 썼다. 이 설정을 가져다가 내가 글을 써보고 싶을 만큼.... 개중 웹소설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게 있는데 실제로 애들이 끝내주는 웹소설 작가가 될 수도 있으니 대충 그런가 하고 넘어가련다.
기승전결을 갖춰 쓰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얼추 이야기의 흐름과 끝맺음까지 다 생각해놓은 애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중간에 봐줄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표절도 하나 보인다. 분명 주인공들 이름은 100% 토종 한국인인데 어째 스탠드... 석가면..? 막바지에는 'DIO'? 이놈은 선생님이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그게 언제적에 나온 건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냐. 모든 다 쓰진 못해서 추석 때 하라고 숙제로 내줬다. 부캐 꿈이 작가인 그 아이도 못 썼다.
"선생님, 솔직히 작가도 앉아서 바로 생각나는 거 아니잖아요. 시간이 좀 필요해요."
어.. 근데 시간을 많이 줘도 생각이 잘 나는 건 아니더라. 그렇게 시간이 많았는데 선생님도 작가 못 됐어..
"선생님, 왜 추석에 숙제 주세요? 저희는 혁명을 일으킬 거예요."
어, 그럼 하루 더 줄게. 목요일에 써서 금요일에 가져와라?
2) 번 릴레이 글쓰기는 보기에 여섯 가지 설정을 줬다.
보기 1. 어느 날 정민은 길을 걸어가다가 담벼락에 그려진 작은 문 그림을 발견한다. 무심코 문을 밀었는데, 문이 스르륵 안으로 열리며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보기 2. 민찬이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다. 친한 친구인 희진이와 영화를 보러 갔는데, 거기서 옛날 유치원 친구였던 민희를 만났다. 민희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돌아섰는데, 희진이는 갑자기 아주 싸늘한 말투로 "나는 집에 갈래." 라고 했다.
보기 6.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소아에게 날개가 생겨 있었다. 어쩐지 간밤에 등이 아주 쑤시고 아프더니.. 소아는 이 모양을 하고 어떻게 학교에 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다. 초반 설정을 바탕으로 돌아가며 한 마디씩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었는데, 선착순으로 설정 여섯 개를 모둠별로 토의해서 가져가도록 시켰다. 일단 아이들의 만족도는 최고였다. 낄낄 웃으며 이야기를 어떻게 요상하게 튀게 할까 수다를 떠는 모둠도 있었고 숨소리도 안 내고 자기 순서의 글을 이어나가는 모둠도 있었다. 진지하든 유쾌하든, 끝날 때쯤엔 누가 공을 멀리 차보내냐를 경쟁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튀어 있었다.
보기 2번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든 모둠은 얘기를 호러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풋풋한 삼각관계 학교 로맨스를 생각했는데... 벽에 빛이 나오는 문이 생긴 이야기는 주인공이 그 빛 때문에 실명했단다.
"야, 선생님은 이거 주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 모험 그런 거 생각했겠지?"
"그런 거 쓰지 마, 우린 사랑과 전쟁으로 가. 완전 현실적인 걸로."
아니 너희들이 쓴 얘기에선 주인공이 육탄전으로 싸우다가 뼈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고 아이돌 라이벌이 됐다가 소속사 대표의 명함 통을 서로의 얼굴에 집어던지면서 싸우고 돈 만원을 주식으로 5조로 불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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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글이 재미없고 고리타분하고 억지로 줄을 늘려가며 쓰는 거라는 생각만 안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학습목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애들이 릴레이 글쓰기를 하며 서로와 더 친해졌다면 그것 역시 배움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이 수업은 성공한 수업이다. 아주 너그러운 기준이긴 하지만....
다음 번 글쓰기 수업에서는 1번에서 생각한 설정을 조금 더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쓴 이야기를 기-승-전-결의 틀 속에 집어넣어 결말까지를 생각하도록 만들 거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쓴 이야기를 구전 설화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들려주라고 해야지. 첫 번째는 그냥, 두 번째는 녹음하면서 하라고 해야지. 글쓰는 것은 그냥 다른 아이들에게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을 글로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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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