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삶이 닮아있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만'이 진짜 삶이라고 생각한다.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는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며 살지 않는다.
차라리 그 반대에 가깝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선택하고, 견디고, 또 해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주부로, 자영업자로 등등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말이다.
반면 여행에서는 원하는 것을 보고 느끼고 먹으며 하루를 온전히 나의 선택들로만 채워나간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드라마 작가가 출연한 적이 있다.
왜 작가님의 작품에는 재벌들이 많이 등장하냐는 물음에 그 작가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람이 돈이 없으면 돈이 전부가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품위와 존엄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돈이 있는 자들은 돈이 있으면 거기서 시작하는 거다.
돈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하고 다른 걸 고민하지 않냐.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모습을 돈과 상관없는 상황에서 시작하기 위해 재벌가에서 시작한 거다.
그러니까 돈 의외의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드라마에 등장했으면 하는데 그게 재벌'뿐'이라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너무도 맞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돈과 상관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은 다른 결정과 다른 생각을 하고 산다는 저 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문득, 내게도 그런 순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의 모든 순간이 그랬다.
그곳에선 돈을 벌어야 하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나라에 가면 아껴야 하는 걱정조차도 하지 않는다.
모든 선택의 기준에서 돈은 제외된다.
선택의 기준에서 돈을 제외시킬 수 있다니, 글로 적고 보니 더 매력적인 일이다.
단순히 뭘 먹고 마실 때 액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넘어,
월급과 내 한 달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경험을 살 때 가성비라는 옵션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재벌이면 이런 일상을 매일을 사는 거구나.
새삼 삶이 참 아름다울 것 같다.
정해진 루틴 없이 그날그날 가고 싶은 전시회를 보고 색다른 원데이 클래스를 듣고,
때로는 공기 좋고 여유 넘치는 곳으로 떠나 좋은 풍경 속에서 눈뜨고 산책하며 가장 맛있는 것들로만 배를 채우고 사색도 하고 수영도하고 등산도 하며 그렇게는 백 년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백 년 동안 매일매일 행복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원데이 클래스만 수백 가지가 넘는 요즘의 세상은 정말이지 그렇게 살아도 심심할 틈이 없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빠져보고 싶은 취미에 흠뻑 빠져 살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까지 있으면,
와. 행복하겠다.
적으면서도 꿈같고 부럽다.
하지만 본투비 재벌이 아니라면 현실에서의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일은 나를 어마어마한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날의 메뉴 정도는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은 때때로 모든 선택이 자유로워지는, 그런 여행을 보내주기도 한다.
최소의 가격으로 최대 효율을 얻어올 수 있는 곳으로 고르고 골라 떠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생보다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진다.
떠난 곳에서 깊은 해방감과 자유로움 같은 것들을 한 껏 느끼고 채운 후, 일상으로 돌아와 그 기억을 붙잡고 다시 일을 한다.
언젠가 기억도, 추억도 희미해져 효력이 약해지면 또다시 떠나면 된다!
느낌표까지 붙여봤지만, 사실 신나지 않는다.
효력이 다하면 또 가서 채워오고, 떠나기 위해 또 일하는 것을 반복하는 삶이라니!
선택권을 갖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며,
그렇게 떠난 곳에서 머무는 시간은 1년 중 3박 4일 정도뿐이고,
나머지 360일은 메뉴'만' 선택하게 되는 삶이라니!
나름 만족스럽게 살았는데, 적고 보니 요즘 말로 킹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