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의 당근 거래기

세상은 넓고 당근은 어려웠다.

by 이월생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마음먹은 맥시멀리스트가 되자마자 처음 한 일은 당근 마켓에 가입한 것이었다.

중고로운 평화 나라에서는 34만 원을 사기당한 전적이 있어 물건을 판매하는 입장으로 참여하는 것도 괜히 꺼려져, 직접 얼굴을 보고 거래하는 플랫폼을 선택했다.


이전 글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당근 마켓에 물건을 올리기 위해 상반신 마네킹을 구매했다.

비우기 위해 또 소비를 하냐는 비난에도 굳건하게 강행한 소비였는데 그 선택이 참 합리적이었다는 걸 자주 느낀다.

옷은 잘 판매가 되지 않는다는 후기와 다르게 내가 올린 옷은 어렵지 않게 판매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정은 상당히 번거로웠다.

상반신 마네킹에 옷을 입히는 일은 생각보다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었으며, 불 꺼놓은 집안에서 문득 마네킹을 마주치게 될 때면 당근으로 번 돈을 병원비에 쓰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들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름의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특히 '블라우스+아우터 세트' 같은 이름을 붙여 한꺼번에 두 가지 옷을 팔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목이 허전해 보여 살짝 얹어놓은 목걸이를 보고는 목걸이도 포함인가요? 같은 질문을 몇 번 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화로운 거래였다.

초반에는 말이다.



당근 마켓을 대략 3월부터 시작했으니 어느덧 반년이 넘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당근 거래에 나름의 노하우가 생길 정도로 활발한 판매자로 활동해왔다.

초반에는 당근에 내놓은 물건들을 올해 안에 판매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막상 당근 거래를 시작해보니 그게 얼마나 헛된 희망사항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당근 거래에는 역시즌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만나서 네고를 요청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때의 희망사항.


가격을 정해놓고 만나도, 막상 마주해서 물건을 받으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25000원에 거래를 약속했지만 막상 만나서는 "혹시 2000원 더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그런 말을 눈앞에서 들으면 상대의 용기 있는 물음에 경외심마저 느끼며 나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하고 만다.

돌아오는 길, 못내 분함이 올라오지만, '나에게 있었으면 어차피 쓰레기에 불과했다'라는 생각으로 정신승리를 해버린다.


솔직히 이 정도는 양반이다.

가장 어이없고 황당한 경우는 약속 장소에 사람이 없을 때이다.

'저는 도착했습니다! 검은색 상의를 입고 있어요!'

'....'

'저기요... 오고 계시나요..?'

처량하게 몇 번을 부르다 보면 더 이상 상대방과 대화할 수 없다는 말이 화면에 나타난다.

그때의 기분이란.. 성악설에 다시금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미리 못 올 것 같다고, 거래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거였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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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이 실제 상황일 때, 아는 거라고는 당근 연락처뿐일 때!

정말 난감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생각했다가도 마주하는 게 사과가 아닌 탈퇴 통보라면 화가 난다.

도덕이 없으신지를 묻고 싶지만 나는 도덕이 있으므로 조용히 귀가한다. (사실 연락할 방법도 없긴 하다)

당근 마켓 관계자가 내가 마지막에 사용한 저 처량한 이모티콘을 괜히 만들어둔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몇 번의 약속 파기를 경험하고 나니, 번거롭더라도 거래 약속을 꼭 설정해두게 되었다.

약속을 설정해두면 해당 시간 30분 전후로 당근 어플을 통해 전화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출발 30분 전 서로에게 알림이 가기도 하니 그 타이밍에 다시금 메시지를 보내 약속을 확인할 수도 있다.

몇 번의 경험들이 나를 기본값이 불신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아 유감스럽다.


그럼에도 내가 당근 거래를 계속하는 건 시작했을 때부터 물건을 처리하는데 충분한 번거로움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래와 같이 은근 쏠쏠한 당근 가계부를 보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당근 마켓 어플은 나의 네고 현황까지는 반영하지 않아 9월 판매액을 128000원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125000원이었다.

여전히 나쁘지 않은 수입이라고 생각한다.

판매를 결정했다면 내게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는 상품이었을 테고, 그냥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면 무게로 계산되어 20kg에 5천 원 정도를 받고 말았을 테니까.

반년을 비워냈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여전히 소유한 물건들만 보면 나는 미니멀리스트보다는 맥시멀리스트에 가깝다.


100년도 못살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또 사용하다가 떠나는 걸까.

생각할수록 인간은 지구에게, 적어도 나는 지구에게 골칫덩어리 그 자체일 것 같다.


앞으로는 반년마다 당근거래기를 브런치에 적어볼 예정이다.

얼마나 많은 물건을 비워낼 수 있을지, 또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말도 안 되는 사람을 만나, 말이 안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브런치에 적을 에피소드가 추가되었다고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맥시멀리스트의 당근 거래기를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