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로 맞이한 블랙프라이데이는 처음이라.
블프 = 플랙프라이데이
: 미국에서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로, 1년 중 가장 큰 폭의 세일 시즌이 시작되는 날
어느덧 2021년도 한 달 남짓 남았다.
차분히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시기에 세상은 블랙프라이데이를 만들어놓았다.
이런 영리한 사람들.
미국의 기념일이지만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11월이면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하기 시작한다.
생산자가 아닌 유통업체가 재고관리를 도맡는 미국은, 소매유통 특성상 재고를 남겨 창고비용과 추가 유통비용을 남길 바에 높은 할인율에라도 재고를 팔아버리는 것이 이득이라 이런 할인을 진행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이유 때문이라기 보단 연말, 소비자들의 소비성향이 증가되어 있다는 것을 노리고 진행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유야 무엇이든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블랙프라이데이가 왜 존재하는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이 나의 미니멀 라이프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유혹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청소기였다.
미국 월마트의 LG 코드 제로가 무려 199불에 올라왔다.
보자마자 이건 안사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치품도 아니고, 소모품.. 은 맞지만 효용가치가 충분한 아주 가치 있는, 나의 삶의 질을 높여줄 무언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구매하지 않았다.
아직 멀쩡한 청소기가 집에 있었고, 30평 남짓한 집에 청소기가 두 개씩이나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갑자기 가지고 있는 청소기가 고장 난 다면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겠지만, 그렇다고 고장 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제품을 세일 때마다 미리 구비해둘 수는 없다.
다시 생각해도 아주 아주 잘 참았다. 구매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한다.
두 번째 유혹은 쓱 찾아왔다.
SSG.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적립된 포인트, 나에게만 주는 거라던(?) 쿠폰, 그리고 블랙프라이데이가 만나니 본 적 없는 가격에 어그 신발이 나타났다.
들어가서 아이디를 입력하고, 쿠폰과 적립금을 적용시켜 본 것 자체가 미니멀과는 아주 먼 행위였다는 점, 인정한다.
견물생심이라고 물건을 보면 구매하지 않기가 더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런 일을 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결론적으로 구매했다.
심해지는 수족냉증에 알루미늄 양말을 구매해볼까, 건식 족욕기를 구매해볼까 하던 차였는데, 결론은 어그였다. 알루미늄 양말과 건식 족욕기를 구매하지 않고 올 겨울을 지나 보낸다면 어그의 구매는 합리적인 소비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어본다.
며칠 신어본 어그는 그래.. 따수웠다. 집에 있는 어떤 신발도 그것만큼 따뜻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만족했다.
미니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옵티멀했다고 생각한다.
내 미니멀 결심은 그렇게 쓱- 밀려났고 나에게는 어그가 생겼다.
5년은 신으리라 하는 결심은 어그와 더불어 방수스프레이를 한 통 사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어그와 스프레이가 나란히 놓인 내 신발장은 조금 덜 미니멀해진 모습이 되었다.
세 번째 유혹은 작년에 팔아버린 겨울옷의 부재였다.
나의 미니멀라이프에 관한 충동적 결심은 올 3월 즈음 찾아왔다.
그맘때쯤 적당히 두꺼웠던 아우터들을 처분하며, '다시 구매하게 될 것인가?' 하는 스스로의 질문에 자신 있게 "노!"를 되뇌며 쿨하게 당근에 내놓았는데, 다시금 애매하게 추워지니 필요한 것들이었다.
"엄마 나 코트들이 다 어디있지?"
"팔았잖아 당근에"
"아니 그걸 다 팔았다고 내가?"
"겨울엔 롱패딩이라면서 다 팔았지."
아니 이럴수가.
겨울이 초겨울도 있고 한겨울도 있는데! 그때의 나는 미니멀라이프에 콩깍지가 아주 단단히 씌었었나 보다.
다 비워내더라도 코트는 하나 있어야지! 상황이란 게 있는데..!!
나참.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이다.
이 말인즉슨, 아직 구매하지 않았지만 이번 블랙프라이데이에 초겨울, 끝겨울, 초봄, 늦가을용 코트를 하나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적어보는 이유는, 충동이 아닌 계획적인 구매라는 의미다.
살면서 겨울에 결혼식을 가게 될 수도 있고, 중요한 미팅이 있을 수도 있는데 겨울용 코트 한 벌이 없을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사는 수밖에 없다.
이 생각을 올초 비워낼 때는 왜 못했나 싶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추워지자마자 바로 행동하지 않고 블랙프라이데이를 기다리며 합리적인 구매를 하고자 고민을 거듭했던 스스로는 칭찬해주고 싶다.
적고 보니 너무 스스로에게 관대한가 싶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원래 본인한테 좀 관대한 스타일이다.
번복을 자주 하지만, 유난히 융통성이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해버린다거나,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도, 'What's happened, happened.' 하고 일어난 일은 어쩌면 운명인 거라고 생각해버리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결론은 이번 블랙프라이데이에 청소기를 참았고 어그와 코트 한 벌을 구매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작년 블랙프라이데이에 수많은 옷들과 전자기기, 심지어 접시들까지 사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는 분명하다.
완벽한 행동만 의미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이렇게 자주 흔들리고 종종 불성실한 미니멀리스트로 살며 간결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언젠가는 다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며.
블랙프라이데이 이야기를 적어보려 검색을 하다 올해 영국의 독립 소매업체 약 85%가 블랙프라이데이를 보이콧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웹사이트들을 그 기간 동안 폐쇄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유는 블랙프라이데이가 과소비를 부추기고, 과잉생산을 하게 만들며, 이는 엄청난 탄소배출량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엄청난 할인폭 앞에서 사용하지 않을 물건을 사게 된다는 점은 공감한다.
가격을 보고 흔들리는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 블랙프라이데이라는 행사가 범세계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이겠지.
모두가 미니멀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물건의 쓰임과 그 물건의 끝을 소비하기에 앞서 해보기를 추천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채 소비를 계획하니 정말 오래도록 함께할 물건만을 구매하는 게 가능해졌다.
변명 같지만 이번의 어그와 코트도 마찬가지이다.
물건을 끝을 염두했고, 정말 그들의 효용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함께할 계획이다.
끝까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이 여전히 많은 게 극복하고 싶은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모두가 2021년 연말, 블프의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저마다의 중심을 지키며, 현명한 소비자가 되기를 응원하며 오늘의 글도 끝맺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