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바람직한' 콜라보레이션
멀티잡 시대에 '본업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말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영역 또한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음악 외에 분야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그 음악가가 훌륭한 재능을 지녔음을 증명하지 않던가. 밴드와 솔로 활동을 불문하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는 뮤지션들은 타 예술 영역과도 자연스레 접점을 이루기 마련인데, 많은 예술 영역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영화 음악 전문가가 아닌 팝 아티스트가 영화 음악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을 위해 한두곡 정도의 OST를 작업하는 일은 이전에도 흔했지만, 이제는 뮤지션이 전면적으로 영화의 사운드트랙 혹은 스코어를 맡는 추세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하나의 예시로 <너의 이름은>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함으로서 큰 성과를 거둔 래드윔프스(Radwimps)가 있다. 이처럼 음악, 영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뮤지션과 영화의 비상한 협업은 운좋게도 수 십 경우를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현재의 문화 애호가들이라면 관심갖지 않을 수 없을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음악만 훌륭할 뿐 아니라 그 그릇인 영화 또한 굉장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1. 알렉스 터너(Alex Turner) - 서브마린(2010)
감성적인 청춘 영화로 많은 힙스터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 <서브마린>. 찌질하고 멋도 없지만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주인공에게도 로맨스가 피어나고 극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투명한 바다의 색을 닮은 어쿠스틱 사운드가 찰랑찰랑 흘러나온다. 기타 사운드와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악틱 몽키즈의 보컬리스트, 알렉스 터너다. 터너의 솔로 데뷔 앨범이기도 한 이 사운드트랙 EP에는 총 6곡의 강렬하면서도 연약한 서정성이 담긴 소년의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기존 악틱 몽키즈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으로 가득하며, 제임스 포드(James Ford)의 프로듀싱으로 작품에 완성도가 더해졌다.
2. 에어(Air) - 처녀 자살 소동(1999)
스피아 코폴라는 음악 선정에 있어 높은 안목을 지닌 감독이다. 패션 화보와 같은 인상을 주는 영상과 잘 맞아떨어지는 팝적인 감각의 사운드트랙 라인업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정점을 찍었지만, 역시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프랑스 출신 일렉트로니카 듀오 에어가 담당한 코폴라의 첫 장편 영화 <처녀 자살 소동>의 스코어다. 이들은 10대 소녀의 권태와 우울을 차갑고도 감각적인 전자 음악으로 표현해냈고, 수록곡인 'Playground Love'의 경우 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다. 이들의 음악은 어쩌면 영화보다도 더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냈는데, 지금까지도 팝 아티스트의 성공한 스코어 앨범으로 손꼽히고 있다.
3. 욘시(Jonsi) -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2011)
마음을 따듯하게 지피는 가족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처럼 서정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보컬리스트 욘시가 제작했다. 그의 파트너인 알렉스 소머(Alex Somers)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영화 개봉 전년도에 발매된 욘시의 솔로 앨범 <Go>의 수록곡도 소수 수록되었다. 워낙 고유한 음색의 보컬에 극의 절정에서는 아예 'Hoppipolla'가 울려퍼지니, 이미 밴드를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 뒷편에 위치한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 그녀(2013)
파스텔톤의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몽환적인 음악들은 이 아름답고도 잔혹한 어른 동화에 깊은 서정성을 배가한다. 대중은 'The Moon Song'을 극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수 있겠지만, 섬세한 관객이라면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앰비언트 사운드와 피아노 및 현악기 연주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감독 스파이크 존즈와 인연이 깊은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 그리고 오웬 팔레트(Owen Pallett)의 작품이다. 아케이드 파이어와 밴드의 멋진 음악 파트너로서 존재감을 발산해온 오웬 팔레트의 협업은 말할 필요도 없이 훌륭하며, 음악과 영화의 섬세한 맞물림은 그저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성공적인 콜라보레이션이다.
5. 세우 조르지(Seu Jorge) -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2004)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시각적으로도 뛰어나지만, 영리한 음악 선정으로 귀를 즐겁게 한다는 점에서 작품의 매력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의 경우 브라질 음악가 세우 조르지가 참여했다. 본 사운드트랙 앨범과 별개로 세우 조르지의 앨범이 '해저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는데, 독특한 부분은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음악을 커버한 곡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외계인 지기 스타더스트의 음악이 브라질의 생생한 리듬과 세우 조르지만의 흥겨운 바이브로 재탄생했다. 이 음악들이 특유의 컬트적인 코미디, 능청스러운 배우들의 연기 위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기고 있노라면, 이 영화와 금세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톰 요크(Thom Yorke) - 서스페리아(2018)
이미 영화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힌 같은 밴드 멤버 조니 그린우드(Jonny Greenwood)와 달리 톰 요크는 영화 음악에 대해서 시큰둥한 듯했지만, 놀랍게도 그 역시 2018년 '서스페리아'로 영화 음악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고 이 소식은 영화와 음악 씬 모두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 사카모토 류이치(Ryuichi Sakamoto)등이 참여한 사운드트랙으로 높은 성과를 거두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 당시 독일에서 발생한 장르인 크라우트 록을 기반으로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음산하고 우중충한 미장센에 덧입혀진 톰 요크의 스산하고 주술적인 음악은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를 더욱 풍부하게 연출해낸다. 과연 우리 시대의 천재적인 음악가다운 재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