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걸맞는 기독교와 탐욕 이야기
우리에게 기독교의 역사가 필요한 이유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높은 이자를 받아서 돈을 번 성직자를 제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1) 탐욕 가득한 이윤 추구는 공식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짓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각지의 교부들이 고금리 대출을 지옥행 급행열차처럼 묘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늘의 심판을 앞 둔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가난한 자를 착취하지 말고 도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기 교회의 문헌에는 재산을 쌓기만 하고 베풀지 않는 부자들에게 섬뜩하게 경고하는 문구가 있다.
"임박한 심판을 주의하라. 부자들이여, 너희는 탑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동안에 굶주린 이들을 찾아라. 탑이 완성된 뒤에는 너희가 선을 행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 것이다."
- 헤르마스의 [목자]2)
이처럼 기독교는 돈에 엄격했다. 현실은 탐욕으로 가득했지만 교회는 원칙적으로 그런 탐욕을 용서하지 않았다. 훗날 기독교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어도, 탐욕을 멀리하라는 교리는 다소 완화될지언정 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장 칼뱅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윤 추구를 폐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든 이윤 추구를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범위 안에 가두려 했다.3)
예를 들어 칼뱅이 여러 목사와 제노바를 통치할 때, 목사들은 대부업자가 사업자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원금의 15분의 1까지만 이자를 받을 수 있게 규제했다. 원래는 5% 금리만 인정하려 했는데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인상한 것이었다. 물론 15분의 1도 다른 도시보다는 낮은 이자율이어서 대부업자들의 볼멘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칼뱅과 목사들은 대부업자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단 0.1%의 이자도 받지 못하게 했다. 생산을 촉진한 대가로 받는 적절한 이자는 기독교적인 것으로 봤지만, 빈곤층에게 생활비를 대출해주고 받는 이자는 그 자체로 '죄'로 규정한 것이다. 이 부분은 초기 교회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칼뱅이 쓴 글에는 이자로 돈을 버는 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가득하다. 칼뱅이 현대에 되살아 나서 당당하게 광고를 내보내는 대부업자들을 본다면 혈압 탓에 쓰러질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업 규제는 칼뱅이 죽는 날까지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에도 부자들은 방법을 찾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칼뱅과 목사들은 분명히 기독교 교리로부터 철저하게 통제받는 자본주의를 원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밤새 일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성과를 달성했다. 중요한 것은 칼뱅과 동료 목사들이 탐욕을 비윤리적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가톨릭 교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하늘이 공장 매연으로 가득차고 거의 모든 물건이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특히, 재산 없는 사람들이 공유지마저 잃고 임금노동자로 전락하는 바람에 계급 갈등이 극심해졌다. 요즘 우리가 보는 촛불시위는 애들 장난일 정도로 과격한 충돌이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유럽 사회의 큰 어른이었고, 따라서 성직자들에게 새로운 사태에 대응할 지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그 지침이 바로 가톨릭 사회교리의 출발선으로 통하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일명 [새로운 사태]다. 가톨릭 교회에서 회칙이란, 교황이 모든 주교에게 보내는 가르침이다. 신부가 일반 신도에게 설교로 사목하듯, 교황은 주교에게 회칙을 보내서 사목하는 것이다. 1891년 5월 15일, 레오 13세는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했는데, 그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자본가와 고용주가 대체로 명심해야 할 원칙은 자신의 이윤 추구를 위해 곤궁하고 불쌍한 사람을 억압하고 이웃의 비참함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신법과 실정법이 모두 금지한다는 사실이다."
-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이는 가톨릭 교회 역시 무분별한 탐욕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가톨릭 교회는 이미 경제의 기본이 되어버린 고용 - 피고용 관계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고용 관계를 차가운 계약 관계가 아니라 따뜻한 공동체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교회는 노동자에게 성실하게 일해서 정당하게 임금을 받을 의무를 부과했고, 고용주에게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않으면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지급할 의무를 부과했다. 자본주의 기업을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기독교적인 공동체로 만들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 후대에 가톨릭 사회교리라고 불렸다.
물론 당시 고용주들은 사회교리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 사회교리는 새로 재건된 자본주의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다.4) 그리고 결국 자본가들을 구속하는 법적인 질서로 자리잡았다. 독일의 독특한 공동결정제도와 가족 중심 복지제도는 가톨릭 사회교리가 기독교민주연합의 강령에 반영되면서 발전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가톨릭 교회는 폭력적인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자유방임 자본주의도 뚜렷하게 거부하면서 기독교 가르침에 충실한, 규제받는 시장경제를 요구했다.5)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탐욕의 상징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많은 종교인이 금욕으로 모범을 보이기보다 외제차를 타며 탐욕 경제를 정당화했다. 그 중 일부는 탈세나 성착취 같은 어디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도 저질렀다. 그 탓에 크리스마스는 사실상 별 의미 없는 홀리데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기독교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동권이나 사회권처럼 우리가 누리는 좋은 것들의 배후에는 기독교인들의 반 탐욕 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는 기독교인이 갈 곳 없는 노인에게 무료로 급식을 주고, 궁핍한 나라 사람들에게 현대 의학의 힘을 전수하고 있다. 그런 공유와 봉사 정신이 오랫동안 국가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탐욕과 싸운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교리가 실제로 세상에 미친 좋은 영향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탐욕 탓에 얼어붙은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위험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되는 근거 하나를 얻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런 믿음을 지지하는 근거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어딘가에서 예수를 본받는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었고, 또 베풀고 있다는 사실은 작은 근거가 된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에 기독교의 복된 행적을 한 번 접해보는 것이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6장 2절 (가톨릭 성경)
출처
1. 최원오, 고리대금의 죄악성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 한국가톨릭철학회, 2015, 11 - 12p.
2. 최원오, 교부들의 사회교리, 분도출판사, 2020, 28p.
3. 이오갑, 칼뱅, 자본주의의 고삐를 잡다, 한동네, 2019, 323 - 328p.
4. 문수현, 독일현대정치사, 역사비평사, 2023, 108 - 109p.
5. 라인하르트 마르크스, 추기경 마르크스의 자본론, 주원준 옮김, 눌민, 2020, 133 - 1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