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주의 6화
진보주의자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투쟁이다. 약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사명으로 통한다. 그런데 누구에 대항해서 투쟁한다는 말일까. 과거에는 투쟁 대상이 뚜렷한 소수였다. 귀족이나 지주, 독점 자본가가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현대 진보주의자는 소수의 상류 계급 뿐만이 아니라 일상 곳곳에 스며든 차별주의와도 싸운다. 사람들을 억압하는 소수의 권력자가 아니라, 다수의 삶에 자리잡은 행동 습관, 사고방식을 겨냥한다.
그래서 약자를 위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우리 이모부처럼 성실하지만 보수적인 또는 진보주의 담론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도 비판의 칼을 겨누게 된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느라 바빴을 뿐인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차별주의자, 혐오주의자, 공감 못하는 소시오패스로 만들어 버린다. 천현우 작가가 칼럼에서‘지방 청년도 나를 맞이할 아내와 아이들의 환한 미소를 꿈꾼다’고 썼다가 여성차별적인 가부장주의자로 내몰린 것처럼.
그런데, 사람들이 진보주의자가 말하는 차별이나 혐오, 무관심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담배가 사회생활의 기본이었던 시절에는 직장 동료나 상사와 친해지기 위해 담배를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배운 담배처럼, 보수적인 사람들도 혼자 거스르기 힘든 사회적 힘 때문에 진보적인 담론과 멀어졌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을 투쟁이나 법적 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한 전략일 수 없다.
실제로 사람은 서로 다른 감각을 느끼며 산다. 어떤 사람은 술에서 단맛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술에서 소독용 알코올 같은 쓴맛을 더 많이 느낀다. 또 어떤 사람은 밀가루를 온몸으로 거부하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밀가루 음식을 달고 산다. 이런 선호는 타고나는 것이며, 그래서 학습으로도 바뀌지 않을 때가 많다.
도덕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감을 비판하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같은 도덕적 문제를 두고도 다른 판단을 내린다. 누군가는 치킨을 먹는 모습을 보며 혐오감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치킨의 기름진 맛을 즐긴다. 누군가는 과도한 불평등을 보며 불공정함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이런 도덕적 성향은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타고난 유전자와 자라난 환경이 각자의 선택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선호하는 정치 이념이나 정치인도 마찬가지 아닐까. 오히려 정치만 예외라고 보는 쪽이 더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정치적 차이는 단순히 잘못된 정보나 엘리트의 음모, 상황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보다 훨씬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더 평온한 삶으로 향하는 중요한 단계이다.”
- 존 R. 하빙 등,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김광수 역, 오픈도어북스, 2025.
정치 이념이 다르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타고난 성향과 평생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뜻이다. 고작 몇 시간 짜리 인권 강의가 긴 시간 동안 자리잡은 습관을 고칠 수는 없다. 우리 이모부는 가부장적이고 가족주의적인 환경에서 평생 살았다. 그런 환경에서 번듯한 어른이자 가장으로 대접받기 위해 수십년 간 소방관으로 일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리잡은 소박한 가족주의는 순전히 이모부의 선택이 아니다. 사회가 빚어낸 삶의 방향이다.
사회가 사람을 그렇게 조각해 놓고 이제와서 부수려고 한다면, 부숴지는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일 것이다.
현대 진보주의자의 투쟁은 타인의 인생을 전면 부정하는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의도보다 결과가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
우리는 성소수자나 외국인 노동자가 처한 아픔 뿐만 아니라, 사회의 주류로 멋대로 분류되었지만 고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소속감과 용돈에 이끌려 광장에서 탄핵 반대를 외치는 사람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도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 수 있고, 무엇보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진짜 변화는 사회 구성원의 최대 다수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변화에 동의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어느 한 순간에 51 대 49로 법을 통과시킨다고 해서 약자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1965년에 서명된 행정명령 11246호를 폐지해 버린 것처럼, 1% 차이로 통과된 법은 나중에 1% 차이로 뒤집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약자를 향한 과도한 공감은 변화에 동참시켜야 할 사람들을 차별주의자로 만들면서,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새로운 사회계약에 동참시키는 과정을 방해한다. 진보주의 정치가 실패한다면,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친절과 도덕의 원천이 언제나 공감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주제에서 공감을 찾아낼 만큼 공감을 아주 폭넓게 정의하거나 '도덕의 정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몹시 건조하고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이은진 역, 시공사, 2019.
“정치적 차이는 일시적이며, 해결할 수 있는 불편함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소리만 늘어놓아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질적인 차이를 인식하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제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차이를 극복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이념 갈등을 부추기지 말고, 이러한 갈등을 초래하는 쟁점의 완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 존 R. 하빙 등,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김광수 역, 오픈도어북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