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만 모르는 보수주의
장동혁 대표가 '반값 전세'를 공약했다. 지방의 공공주택 임대료 조정위원회를 통해서, 공공주택의 전세 가격을 주변 시세의 절반으로 낮추겠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공공주택을 확대하겠다는 이야기는 없어서, 기존 공공전세임대주택을 더 싸게 공급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1호 공약 치고는 약하다. 공공전세임대주택 자체가 적은데 도심에서 먼 경우도 있어서, 주택 문제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 정부의 재정 지출을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했으면서 또 다른 나랏돈 들이붓기 정책을 들고 왔다며 비판받을 수도 있어 보인다.
사실, 장동혁 대표는 다급한 상황이 아니었어도 이도저도 아닌 공약을 꺼내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보수주의자 대부분은 스스로 손목에 녹슨 족쇄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미국의 시장 보수주의만 수입돼서 그런지,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는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복지국가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적자 재정은 '그 사용처나 국유자산의 양과 상관 없이' 미래세대에 빚을 떠넘기는 것이고, 복지국가는 '그 방식과 상관 없이' 사람을 게으르게 하거나 불공정하다는 식이다.
물론 강한 자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몰락한 사회진화론을 진지하게 믿는 경우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보수주의자가 공동체를 위해 정부 크기를 경계한다. 당장 힘들더라도 후손에게, 나라 전체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빈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좋은 의도와 좋은 정책은 별개 문제다. 우선 적자 재정이 반드시 미래 세대에 짐이 되지는 않는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받지 않았고, 내국인이나 국내 기관이 국채를 훨씬 더 많이 매입하고 있고, 세수입으로 국채 이자를 감당할 수 있고, 국채를 팔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신뢰를 잃지 않았다면, 어느정도의 적자 재정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현대화폐이론과 무관한 주류 경제학이다.
여기서 재정을 민생지원금으로 흩뿌리기보다 생산적인 곳에 투자한다면, 증세 없이도 국채 이자만큼의 세수를 추가로 얻을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금리가 전보다 낮아진다면, 새 국채를 늘려도 기존과 이자 부담은 비슷해질 수도 있다. 무리하고 비생산적인 적자 재정은 분명 망국적 포퓰리즘이지만, 모든 적자 재정이 그런 것은 아니다. 재정은 쓰기 나름이다. 그럼에도 적자 재정을 선택지에서 제외해 둔다면, 고를 수 있는 정책은 지금 남은 것을 약간 손 보는 것 정도만 남게 된다.
"정부 크기는 어느 정도가 적정할까. 딱히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 유능하다면 큰 정부가, 무능하다면 작은 정부가 정답이라고 대충 말해도 무리가 없다."
- 전주성, '재정전쟁'
복지국가를 보는 관점도 왜곡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가 복지국가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와 연결짓는다. 복지국가를 강화하다보면, 결국 나라가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비탈길'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 정작 20세기 공산주의자 일부는 복지국가에 비판적이었다. 죽어야 하는 자본주의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라는 말을 처음 퍼뜨린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 윌리엄 템플이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사회연대, 사회국가가 복지국가와 비슷한 말로 통했지만, 역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처음 만들고 퍼뜨린 말이었다. 심지어 그 중에는 왕 또는 황제와 협력해서 '복지군주제'를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가 사회주의자들만의 단어인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사회주의자들만 복지국가 건설에 힘쓴 것은 아니다.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또 다른 대주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폐해로부터 전통 공동체를 지키려던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다. 비스마르크는 기독교 문명과 카이저를 정점으로 하는 계급 사회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그런 비스마르크가 보기에,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계급 갈등을 초래해서 제국의 결속을 해치는 주범이었다. 노동자들이 외국의 민주주의 사상에 더 물들지 않게 막기 위해서라도, 비스마르크는 자본주의를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가가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는, 국가 독점 사회보험 체계를 구상했다.
자본가와 보수층에서 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응수했다. "국가의 보다 큰 이익을 위해 취해진 많은 수단들이 사회주의적이다. 그리고 우리 제국은 좀 더 많은 사회주의에 친숙해져야 할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책안이 국가state 사회주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요구한 보통선거나 평등한 권리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이 노동계급을 충성스런 신민으로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여겼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개인들은 많은 자선을 행할 수 있지만, 사회문제는 오직 국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윈스턴 처칠도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처칠은 원래 자유무역과 온건한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자유당 사람이었다. 로이드 조지 내각에서 장관도 맡았다. 처칠은 철저한 제국주의자이자 영국 헌정질서의 수호자였고, 무분별한 평준화와 공산주의를 불신한 개혁가였다. 그런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부터 보편적인 의료보험 등 여러 복지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당시 보수당 개혁파로부터 개혁에 미온적이라며 비판받았다.
보수주의가 반드시 작은 정부와 시장만능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자 재정과 복지국가가 반드시 사회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러 보수주의자들이 계급 갈등으로부터 더 중요한 것을 보존하기 위해 큰 정부를 만들고 복지국가 건설에 동참했다. 보편적 복지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마다 의견이 크게 엇갈렸지만,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미국의 네오콘을 포함한 여러 보수주의 사상가들이 광범위하게 동의했다. 그 이름을 다 적으면 영남 만인소를 뛰어넘는 분량이 나올 것이다.
최근 보수정당이 궁지에 몰리면서 '보수 혁신'이 새삼 중요해졌다. 하지만 그 혁신의 내용은 공허하다. 그래봐야 당대표를 교체하고 윤어게인과 멀어지는 것인데, 윤석열 탄핵 전에도 한국 보수는 건강하지도 유연하지도 않았다. 마이너스 요소를 빼봐야 남는 것은 0 뿐이다. 그런 원점 복귀를 혁신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아무리 사람이 바뀌어도 이념이 그대로라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뿐이다. 재정과 복지국가를 보는 낡은 관점 정도는 개선해야, 보수가 혁신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가와 고용주가 명심해야 할 원칙은 자신의 이윤 추구를 위해 곤궁하고 불쌍한 사람을 억압하고 이웃의 비참함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신법과 실정법이 모두 금지한다는 사실이다."
-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참고자료
1. Olivier Blanchard, Public Debt and Low Interest Rates, American Economic Review 109(4), 2019.
2. Barry Eichengreen, et al, In Defense of Public Debt,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3. 전주성, 재정전쟁, 웅진지식하우스, 2022.
4. G. D. H. Cole, A History of Socialist Thought : Volume 1, London Macmiilan CO, 1953.
5. 가스통 V. 림링거, 사회복지의 사상과 역사, 비판과대안을위한사회복지학회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1.
6. 박근갑, 사회민주주의와 자치행정 — 개념사로 다시 읽는 비스마르크 복지정치 -, 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no.92, 2007.
7. 박지향, 윈스턴 처칠 - 운명과 함께 걷다, 아카넷, 2023.
8. Gary Love, Making a 'New Conservatism': The Tory Reform Committee and Design for Freedom, 1942–1949,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Volume 135, Issue 574, 2020.
9. 피터 콜리지, 자본주의에 맞서는 보수주의자들, 이재욱 옮김, 회화나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