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번듯한 수입원은 없다. 보장된 미래도 없다. 그래도 살면서 지금 가장 마음이 편하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미용실에 예약 전화를 걸기 전에 잠시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약국에서 나올 때는 인삿말도 더듬었다. 한 번 걱정에 빠지면 서너 시간 동안 흉골 근처가 지끈거려서 일상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심장이 벌렁거리거나 그러지 않는다.
고등학교도 반 년 밖에 안 다녔다. 집안 사정도 문제였지만 내 정신이 학교를 견디지 못했다. 왕따 같은 사건을 겪지는 않았다. 그저 냉방병이나 체력 부족인 줄 알았다. 주변 어른들이 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원인이 무엇이든, 나는 학교를 빠져나와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 꼼짝 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생활을 3년 반복할 걸 생각하면 명치가 뭉개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가출까지 감행해서 자퇴를 관철시켰다. 물론 그런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원인을 잘못 알았는데 효과적인 대책을 떠올렸을 리가.
얼마 뒤 아빠가 죽었다. 그제서야 아빠가 제대로 된 소득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빚만 남겼지만 그건 상속을 거부해서 떠안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아빠가 본인 신용으로 부족해서 엄마 신용까지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엄마도 아빠가 방해하는 바람에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해서 마땅히 일할 곳이 없었다. 한동안 엄마는 시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카드와 대출 돌려막기로 충당했다. 결국 어느 시점부터는 그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엄마가 새로 취직한 회사가 직원 복지 차원에서 개인회생 절차를 돕고 있었다. 개인회생을 거치면 기존보다는 이자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문제는 엄마 월급으로는 생활비에 개인회생 변제금까지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서야 했다. 동생은 아직 초등학생이었으니, 마침 19살인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변제금을 보태기로 했다. 그 때까지도 내 정신건강이 무너진 상태였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출간될 책에 다 풀었다. 중간에 자살도 시도하고, 군병원에서 공황장애로 진단받아서 현역부적합심사로 전역하고, 약을 먹으면서 집에 돈을 보냈다. 그렇게 엄마 개인회생을 잘 마무리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바로 수년 전까지 죽고 싶은 생각이 가라앉지 않았고, 집중력도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신이 1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하면, 나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 듯하다.
그럼에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책을 통해서든 밖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서든, 세상에는 상상하는 것도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접했으니까.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그저 멋있어 보여서 고른 사상이 아니다. 고작 맑스와 그 아류들을 공부했을 뿐이라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는 단어조차 못 들어본 사람들보다는 내 쪽이 사회주의에 더 진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남자, 이성애자, 비장애인이라서 누린 특권을 생각하라는 말에는 납득하기 어렵다. 절박하게 싸울 필요 없었던 행운을 누린 것이라는 소리에는 솔직히 화가 난다. 물론 여자이고 동성애자이고 장애인이었다면 더 고된 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개인회생조차 돕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때 겪은 감정과 고통이 옅어지지는 않는다. 나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어깨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저학력, 저소득, 정신질환자'도 딱히 좋은 지위는 아니지 않나.
세상에는 고된 일상을 견디고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도, 불안정한 처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도 있다. 경제적 불안, 지위 불안은 유전자와 체중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정도로 파괴력 있는 문제다. 그런 문제 탓에 소진되어 가는 사람들이 사회적 강자, 특권층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약자를 외면하는 이기주의자로 내몰리고 있다. 편견 갖지 말라는 사람들이 중간에 끼인 사람들을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 정치적 입장이나 특정 정체성만 보고 타인의 불행을 함부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내 도덕 감각과 이념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