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정치 갈등을 키우는 이유

인권은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원인일 수 있다

by 이완
Gemini로 제작


인권 목록에 현금을 주고 버스를 탈 '권리'는 없다. 극장이나 항공사에 자기 허리둘레에 맞는 넓은 좌석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다른 사람의 출근길을 가로막으며 시위를 벌일 '권리'는 없다. 그런 권리는 어느 인권 선언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기성 진보주의자는 모든 사회적 요구를 인권으로 끌어올린다. 비교적 단순했던 인권 목록을 끝없이 늘려나간다.

권리란 기본적으로 정부나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적인 자격이다. 나에게 재산권이 있다는 말은 타인에게 내 것에 손대지 않을 것을 정당하게 강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은 사회구성원에게 내 의료비를 분담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모든 권리는 사회구성원이 의무적으로 인내를 발휘하고 비용을 부담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 그래서 권리를 보장할 때는 누구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해야 공정한지, 각 구성원이 그런 의무에 얼마나 충성해 줄지를 따져봐야 한다. 권리 문제에서는 수혜자 관점뿐만 아니라 기여자 관점도 중요하다.

이때 권리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양심에 따라 부자의 삶보다 빈자의 삶을 우선시할 수도 있고, 양심에 따라 딸을 명예 살인할 수도 있다. 이는 재산권이나 생명권과 충돌한다. 이렇게 여러 권리가 충돌할 때를 대비해서, 과거에는 권리마다 유보 조항을 두거나 공공이익처럼 충돌을 중재할 수 있는, 더 높은 가치를 설정해 뒀다.

그런데 현대 인권은 그 자체로 최상위 가치다.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하다.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아무튼 인권은 의심할 여지 없는 최종 근거로 통한다. 도덕적 정당성이 부족하고 논리적 결함이 많더라도, 사회문제에서 인권은 최고 존엄으로 대우받는다. 주로 진보주의자들이 인권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이런 인권 절대주의는 진보주의자를 게으르게 만들었다. 기성 진보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지금 당장, 타협 없이 실현되어야 하는 정책의 근거로 인권을 들고 온다. 마치 인권 외에는 사회정의의 도덕적 기반을 찾을 수 없다는 듯이, 모든 사회 문제를 인권 침해로 포장한다.

그 결과, 진보 담론은 권위에 의한 논증으로 전락했다. 물론 일상에서든 정치에서든 누군가의 권위를 빌려야 할 때가 많지만, 이는 서로 다른 분야끼리 지적으로 분업하고 협력하기 위한 것이다. 인권의 권위는 저런 쌍방향 소통을 위해 다른 분야 전문가를 신뢰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저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무기에 가깝다.

인권이라는 최고 권위 앞에서, 사회구성원에게 공정하게 의무를 부과하고 이익과 손해를 조정하는 정치적 과정은 사라진다. 그 대신 이기는 쪽은 인권을 얻고, 지는 쪽은 인권 침해자가 되거나 일방적인 기여자가 되는 제로섬 게임이 시작된다.

기성 진보가 그런 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무엇이든 인권 문제로 여기는 풍토는 어떻게든 국회에서 다수결을, 법원에서 승소를 노려서 상대를 침묵시키는 정치 문화를 만든다. 모두가 천자를 앞세워서 명분을 무기로 휘두르려는 조조가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 인권 담론은 진보를 게으르게 만들고 결국 정치 그 자체를 힘겨루기로 변질시킨다. 인권이란 말의 무게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은 덤이다.

“문제를 인권으로 프레이밍하는 것은 자신들의 불만을 타협할 수 없는 권리로 이해하게 된 사회 행위자들 사이에 교착된 갈등의 장을 마련한다.”
- 도미니크 클레망, 캐나다 역사사회학자

원문
Framing the issue as a human right sets the stage for a deadlocked conflict between social actors who have come to understand their grievances as non-negotiable rights.
출처
Dominique Clément, Human rights or social justice? The problem of rights inflation,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Human Rights, Volume 21, Number 3, 2017.
DOI: 10.1080/13642987.2017.1349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