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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공대생 Mar 18. 2021

<화전가> 배삼식

<화전가> / 배삼식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민음사 온라인 패밀리 데이에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배삼식 작가가 쓴 희곡인 <화전가>는 제목처럼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집안의 여성들이 4월의 봄에 꽃놀이를 가는 내용이다. 희곡은 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선 배우들의 말로 완성되는 문학이다. 언뜻 같다고 착각하곤 하는 글과 말이지만 <화전가>를 읽어보면 글과 말의 다름을, 그리고 말로 언어를 내뱉을 때만 표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집안에는 여성들 밖에 남아있지 않다. 1950년 4월, 한창 이념과 진영이 국토를 휩쓸며 거대한 내전을 앞두고 있던 그때, 남성들은 이념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갇혀 있거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숨거나 그도 아니면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여성들만이 집안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집의 안주인,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김씨의 막내딸 봉아가 내려오고 대구로 시집간 둘째 딸 박실이도 집을 찾아와 오랜만에 집안이 북적대기 시작한다. 마침 밤을 새우며 귀신을 쫓는다는 경신야(庚申夜). 밤이 지나는 동안 여인들은 봉아가 가져온 초콜릿과 커피를 나눠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와중 흥이 오른 여인들은 다음날 화전놀이를 가기로 하며 밤을 지새운다. 다음날 화전놀이를 다녀온 여인들이 헤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막이 내린다.


암울한 상황이다. 집안의 남자들은 전부 감옥에 있거나 행방을 알 수 없고 전 국토가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안정하다. 그 와중에 여인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하룻밤은 꿈만 같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기뻐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 이념과 진영, 전쟁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어느 한 구석에서 펼쳐지는 여인들만의 즐거운 경신야와 화전놀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곤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헤어지는 여인들의 모습이 슬프다. 김씨는 두 달 뒤에 6.25 전쟁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봉아와 박실이, 홍다리댁을 보내고 며느리인 장림댁에게는 친가에 다녀오라며 귀한 치마와 가락지를 싼 보자기를 쥐어준다. 그렇게 헤어진 그들은 아마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달 뒤 벌어진 전쟁이 모두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이념이 무엇이고 진영이 무엇이기에 그녀들을 갈라놓았는지, 이념과 진영과 전쟁에 그녀들의 만남과 이야기와 화전놀이를 막을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희곡은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위해 쓰인 문학이다. <화전가> 속 글들은 글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배우들의 입에서 말로 변환되어야만 완전해진다. <화전가>의 배경이 1950년 4월 경북 안동인만큼 그 당시 경북에서 쓰이던 사투리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도저히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문장들도 수두룩하다. 아무리 글자를 들여다봐도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 포기하려고 할 때쯤 이 책이 희곡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고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해가 되지 않던 문장의 뜻이 마법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글로는 이해되지 않던 문장이 입을 열어 말로 꺼내는 순간 이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 잘 되지도 않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흉내 내가며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혹시 <화전가> 속 사투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독자가 있다면 소리 내어 문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화전가 뒤표지에 적힌 박민정 소설가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화전가>에는 대문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슬픔과 투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려는 사람들의 놀이가 회화처럼 담겨 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1950년 4월의 어느 날 경북 안동 한 집안의 여성들이 화전놀이를 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화전가>는 전쟁에 가려져 있던 일반인들의 삶을 끄집어내 우리 앞에 보여준다. 이것이 문학의 의의다. 알려지지 않은, 가려진 자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들춰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화전가와 같은 희곡이, 또는 문학이 더 많아져야만 한다, 반드시.


책 속 한 문장


김씨   그래, 무신 생각을 그래 장하게 했노?

봉아   인생, 인생에 대해서.

김씨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생각해 보이 어떻드나?

봉아   머 빌거 없는데.

김씨   없는데?

봉아   빌것도 없는 인새이 와 이래 힘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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