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 쓰는 공대생 Jun 10. 2019

아몬드

'아몬드' / 손원평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마 필자에게는 영원히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영역일 것이다. 감정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또는 짐승만도 못하게도 만드는 부분인데,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드는 굉장한 일이 아몬드처럼 생긴 조그마한 편도체 하나로 조절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 소설은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소년의 시선에서 담담하게 풀어냈다. 희미한 감정의 끝자락을 아등바등 움켜쥐려고 하는 그의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의외로 찬란해서 더 슬펐다.



읽으면서 저번에 리뷰 했었던 소설인 '노르웨이의 숲'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의 편도체가 작아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감정 표현 불능증에 걸린 주인공 선윤재. 그의 어머니는 윤재가 언젠가는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감정 하나하나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지만 윤재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에게 눈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잘해준다 해도 눈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시킬 수 없듯이. 감정을 직접 느낄 수 없는 윤재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묻지 마 살인에 의해 윤재의 할머니는 죽고 어머니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윤재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빈자리를 느끼고 실감하면서도 슬픔이라는 감정만은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비정상일까? 필자에게는 오히려 그런 윤재의 모습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그 누구보다도 정상적이다. 반면 그의 학교 친구들은 윤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를 따돌린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주제의식이 이 소설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윤재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곤이. 곤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어버려 미아가 되었다가 나중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을 때가 되어서야 친아버지인 윤 교수가 행방을 찾고 곤이를 데려온다. 그러나 이미 세상에 상처 받은 곤이는 마음을 걸어 잠그고 폭력과 반항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였고 자신에게 반응조차 하지 않는 윤재와는 악연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윤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며 마음을 연다. 필자의 생각에 감수성이 풍부하고 순수한 아이였던 곤이가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버티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의 문을 잠그고 센 척을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곤이에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마치 동족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곤이가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해 주겠다는 이유로 윤재의 눈 앞에서 살아있는 나비의 날개를 뜯고 바늘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달리 오히려 곤이는 마치 자신의 날개가 뜯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한다. 곤이의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순수하고 마음 여린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자신의 진짜 감정을 깊숙이 숨기고 겉으로는 거짓 감정만을 내보이는 곤이. 이 얼마나 위태롭고 아름다운 대비인지. 그 둘이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언제 터질지 몰라 걱정스러우면서도 자연스레 필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게 만들었다.



이 소설에서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윤재의 첫사랑인 도라의 이야기와 소설의 결말이다. 도라는 윤재의 첫사랑으로 윤재가 처음으로 감정다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존재이다. 그러나 도라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소설 속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윤재가 처음으로 감정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잡게 해 준 인물의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소설의 결말 또한 꼭 이렇게 끝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윤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핍이 사라지지 않고 끝났으면 더 좋은 결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윤재가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부분"인 감정의 결핍이 "정상적"으로 "고쳐"져서 모두가 행복하게 정상적으로 살았답니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이미 윤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많은 사람들(엄마, 곤이, 도라, 심 박사 등등)이 있고 그들에게 윤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핍은 비정상적인 점이 아니라 그저 윤재의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남들과 다른 점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드는 주제의식이 이 소설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윤재의 감정 표현 불능증이 고쳐지면서 윤재가 세상이 생각하는 정상의 기준에 들어가며 끝나는 결말이 오히려 주제의식을 흐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더라도 그런 윤재를 이해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충분히 재미있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교훈(?)도 있다. 그냥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이 겪는 아프면서도 빛나는 성장기를 목격한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르웨이의 숲(번역본 제목 : 상실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