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 이언 매큐언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칠드런 액트'. 번역하자면 아동법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피오나 메이 판사는 아동법에 의거하여 한 소년의 목숨과 신념 사이에서 판결을 내린다. 과연 그 판결은 옳은 것이었을까? 아동의 복지(단순한 의식주만이 아닌 아동의 인생과 미래와 권리를 포함한)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단순한 문장이 얼마나 실행하기 어려운지 이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영국 고등법원의 판사 피오나 메이, 그녀는 일요일 밤 남편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열정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다며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허락해달라는 남편의 요구. 피오나의 결혼 생활은 한순간에 파탄날 위기에 처한다. 그 와중에 법원으로부터 긴급한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믿고 있는 백혈병 환자, 17세 소년 애덤이 종교를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고 있고 병원 측에서는 애덤을 살리기 위해 수혈을 할 수 있도록 법원에 허가를 요청하고 있다는 전화였다. 피오나는 남편의 말에 혼란스러운 상태로 애덤의 수혈 여부에 대한 법적 판결을 내리는 일을 맡게 된다. 그녀는 수혈을 해서 애덤의 목숨을 살리는 판단과 애덤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 수혈을 막는 판단 중 어떤 것이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결정인지 고민하다 결국 애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판결을 내리기로 한다.
피오나가 고민하는 두 판단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고 어떤 판단이 틀리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환자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치료를 하는 것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애덤의 수혈 거부를 존중하는 선택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애덤은 아직 18세가 되지 않은 미성년인 만큼 미숙한 가치 판단과 신념으로 인해 정확한 이해가 동반되지 않은 수혈 거부 요청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애덤의 상태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판단 없이 환자의 기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애덤의 수혈 거부를 마냥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즉 두 갈래의 길은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존중할 것인지, 어느 쟁점에 더 무게를 둘 것인지를 고려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피오나는 병원에 누워 있는 애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과연 애덤이 종교에 대해, 자신의 수혈 거부가 불러올 결과와 그 후유증에 대해, 18세 성인이 되기까지 몇 달이 남지 않은 만큼 본인의 신념을 성숙하고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판결을 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애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피오나는 수혈을 허가하는 판단을 내린다. 애덤은 18세에 가까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다른 종교적 관점을 접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애덤의 부모님이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다.) 아동기 내내 하나의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온 이상 애덤의 종교적 신념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굳건한 신념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며, "건강을 회복한다는 가정하에 A(애덤)의 복지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 새롭게 발견한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 활발한 사고력 발휘와 장난기 많고 다정한 본성의 표현이며, 그리고 아이 앞에 펼쳐질 모든 삶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피오나는 이와 같은 판결을 통해 애덤이 삶을 이어나가도록 만든다.
여기까지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으로 애덤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판결 이후 수혈을 통해 목숨을 구한 애덤은 지속적으로 피오나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달라진 생활, 여호와의 증인의 규율을 어기고 수혈을 받은 일에서 느끼는 배덕감과 살았다는 다행과 행복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마음, 시에 대한 사랑과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 종교 문제로 불거지는 부모님과의 다툼 등등. 하지만 피오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남편과의 관계, 그리고 판사로서 판결 당사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이유와 핑계의 중간쯤 되는 마음으로 애덤에게 답신을 보내지 않은 채 순회재판을 떠난다.
애덤은 폭풍우가 치는 날 밤, 피오나가 순회 재판을 위해 묵게 된 마을로 영국을 종단했다고 표현할 만큼 긴 거리를 여행해 흠뻑 젖은 채 찾아온다. 피오나는 자신의 집에서 하숙생처럼 묵으며 같이 지낼 수 없냐는 애덤에게 동정을 느끼지만 애써 그 감정을 부정하며 애덤과 거리를 유지하고 결국 애덤을 돌려보낸다. 애덤을 부모님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남편과의 관계도 회복되어가며 서서히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던 피오나. 그녀는 생애 최고의 연주회를 마치고 잭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가던 밤, 백혈병이 재발한 애덤이 수혈을 거부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무너지듯 눈물을 터트린다.
애덤이 계속해서 피오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는 여전히 쾌활하고 명랑해 보이는 애덤은 속으로 피오나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제발 도와달라고, 어른의 조언이 필요하다고. 삶이 너무 혼란스럽고 내가 평생 믿어왔던 종교는 당신의 판단으로 무너졌으며 나는 그렇게 종교를 배신하고 살아나 죄악스러운 행복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그런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답을 달라고 애덤은 피오나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구조요청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피오나는 파탄날 지경에 처한 결혼 생활과 판사라는 직책을 핑계로 애덤의 손을 외면하고 거리를 벌린다. 애덤이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했던 피오나가 그를 외면하자 애덤에게 정신적 멘토이자 성숙한 어른으로써 혼란스러운 삶에 방향을 잡아줄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여호와의 신도인 애덤 주변의 어른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배반한 애덤에게 적절한 길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애덤은 그렇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피오나를 끝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피오나의 판결은 애덤의 복지(미래, 삶, 꿈, 희망 등)에 아주 적절한 조치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 판결은 백혈병이 재발한 애덤이 수혈을 거부하고 간접적 자살을 선택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애덤이 건강을 회복한 미래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던 수혈 허가 판결은 결국 애덤의 백혈병이 재발하기 전 몇 달간 애덤에게 고통과 혼란과 불안만을 안겨주었고 애덤은 백혈병이 재발하자 전과 같은 수혈 거부 의사를 보인다. 만약 피오나가 수혈 거부를 존중하는 판결을 내렸다면, 그녀가 애덤에게 적절한 조언자와 어른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었다면, 잭이 피오나에게 다른 여자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아동의 복지란 생각보다 훨씬 판단하기 어렵고 첨예한 문제였다. 아동법은 단순한 판결에서 끝나지 않고 아동의 미래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그 판결은 보통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아동 재판에서는 아동의 집안 환경, 부모님의 유무, 나이, 교육 수준 등등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여 미래에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도록 계도할 수 있는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아동은 아직 미성숙하고 보호가 필요하며 앞으로의 성장과 기나긴 미래가 남아 있는 존재이기에 판결을 내리는 자는 한 아이의 일생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판사가 겪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의심과 불안, 판결의 대상인 아동과의 적절한 관계와 거리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피오나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피오나나 애덤이 잘못한 것은 없다. 피오나는 그때그때 자신의 사고 안에서 최선으로 생각되는 판단을 했고 애덤도 그저 자신의 혼란을 이끌어 줄 멘토를 원했을 뿐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비극은 일어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미성숙한 아동에 대한 판결은 그 한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판결은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미친다. 어른들에겐 아이를 주시하며 무언가 잘못된 건 없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의 판결이 아이의 복지를 해치게 되지는 않는지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소설 속 한 문장
"요컨대 저는, A와 그의 부모, 회중의 장로들이 본 법정이 가장 중시하는 A의 복지에 해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합니다."